읽고본느낌

슬로 라이프(1)

샌. 2005. 12. 19. 14:42

노인: "훌륭한 젊은이란 게 뭐겠어. 어서 벌떡 일어나서 얼른 일을 하라구, 일을!"

젊은이: "일을 하면 어찌 되는데요?"

노인: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지."

젊은이: "돈을 벌면 어찌 되나요?"

노인: "부자가 되지!"

젊은이: "부자가 되면 어찌 되는데요?"

노인: "부자가 되면 놀면서 지낼 수 있지."

젊은이: "저는 벌써 놀면서 지내는 걸요!"

쓰지 신이찌가 쓴 '슬로 라이프(Slow Life)'를 읽고 있습니다.위의 예화는 이 책이 말하려는 내용의 일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책의 목차에 나오는 제목들이 슬로 라이프를 위한 키워드이면서 동시에 성찰의 소재로도 적당할 것 같습니다. 본문의 중심 내용을 발췌해서옮겨 봅니다.

<슬로 라이프> - 느리고 단순한 삶은 우리의 마지막 선택이다.


은퇴 후의 느긋한 삶을 위해 지금은 맹렬하게 일한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빠르고 더러운 경제가 슬로 라이프를 가져다 준다는 것은 세계화 경제가 전 지구를 풍요롭게 한다는 식의 논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소박하고 느긋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역시 풍요로운 자연에 기반을 둔 ‘지속 가능한 친환경 경제’의 구상과 창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씩 뺄셈을 시작하여 서서히 줄여가는 길밖에는 없다.


<걷기> - 슬로 라이프의 첫걸음은 산책을 되찾는 일이다.


슬로 라이프의 첫걸음은 산책을 되찾는 일이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곧게 뻗은 길을 버리고, 샛길로 들어가 한눈을 팔거나, 멀리 돌아가면서 이것저것 살펴보는 것을 자신에게 허용하는 일이다. 자동차를 타는 대신 천천히 걸어보는 사치를 자신에게 허락하자. 어디 한번, 느릿느릿, 어슬렁어슬렁 걸어 보자.

노는 즐거움, 자신이 어딘가 목적지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생각에서 해방되어 지금을 사는 자유, 그저 거기에 존재함으로써 얻는 기쁨을 인정하자. 그 역시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이라 여기면서. 단순한 취미나 여가에 속하는 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서, 본질적인 시간의 사용 방식으로서 말이다.


<방랑> - 진정한 풍요를 위해 물질과 돈에 의지하지 말자.


하루에 3킬로 40년 걸어서

사람은 지구를 일주한다

하루에 30킬로 36년 걸어서

사람은 달에 도착한다

- 나나오 사카키


1.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을 구하자

2. 공장 제품이 아닌 손으로 만든 것을 쓰자

3. 슈퍼마켓이 아닌 개인 상점 또는 생협과 손잡자

4. 허영과 낭비의 상징인 과대 광고를 거부하자

5. 최대의 낭비인 군국주의에 연관되지 말자

6. 생활의 모든 면에서 더욱 연구하고 창조하자

7. 새로운 생산과 유통 시스템을 시도하자

8. 땀과 생각을 서로 즐겁게 나누자

9. 진정한 풍요를 위해 물질과 돈에 의지하지 말자

10. 야생을 향한 첫걸음 - 잘 웃고 자주 노래하고 잘 놀자

- ‘경쾌하고도 믿음직스러운 경제 사회로 나아가는 길’


<근면 - 게으름> - 생각해 보자, 누구를 위한 근면인가...


수많은 전쟁을 관통하는 사상으로 생산주의와 경쟁주의가 있다. 러셀은 그것들이 노동의 존엄이라는 신화로 지탱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 현대인은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다른 일의 목적이 되어야만 가치있게 여긴다며, 세기를 넘어 번성하고 있는 공리주의와 효율주의의 함정을 비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보는 사회, 그곳에서 ‘지금’은 장래를 위해 투자되어야만 하는 시간이다. 또한 거기서의 여가란 내일의 노동력을 준비하는 재생산일 뿐이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은 그 자체로는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노동력의 재생산이나 오락 산업의 번영을 위한 것일 때라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용서받기 힘든 일. 그냥 걷기 위해서 걷는다거나 그저 빈둥거리고 싶다거나 또는 그저 멍하니 경치를 바라보는 일은 게으름뱅이나 하는 짓이다. 그저 살아가고 살아 있으니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패스트 하우스 - 슬로 디자인> - 입고 먹고 사는 일 모두를 다시 디자인하기.


과거의 집이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나갔던 공간이다. 하지만 오늘날 주거 문제에서 전문가 집단의 독점 지식이나 기술, 기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은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전선, 전화선, 가스관, 수도관, 하수도 등, 우리는 수많은 관을 통한 생명 유지 장치와 연결되어 살아가는 ‘식물인간’인 셈이다.

맥도날드화, 세계화, 패스트푸드화의 물결이 전 세계 음식 문화를 급격하게 침식하고 있다. 그러나 맥도날드화하고 있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라 우리 생활 전반이다. 패스트푸드에 대항하여 최근 일부 지역에서 ‘먹는 기술’의 복권을 요구하는 슬로 푸드 운동이 시작된 것처럼, 이제는 ‘주거하는 기술’의 재생을 향한 ‘슬로 디자인 운동’이 곳곳에서 태동하고 있다.


<맥도날드화> - 패스트푸드가 세계를 균질화 시키고 있다.


패스트푸드란 단순히 시간이 걸리지 않아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음식이나 요리법뿐만 아니라, 음식을 둘러싼 사람들의 생활, 인간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산업 구조 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양식이자 사상이다.


<반세계화> -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시장 교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어 온 문화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버린다. 우리들의 시간도, 지식도, 경치도, 물도, 그리고 음식물도. 보베와 그 공동체 사람들은 이에 대해 단호히 ‘안 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에 절대 반대한다고, 그러한 시스템에 말려들기를 거절한다고. 인간 관계, 땅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들의 생명을 돈으로 환산하기를 거부한다고. 공장에서 만들어진 음식물들이 WTO에 의해 억지로 입에 쑤셔 넣어지기를 거부한다고. 우리에게는 자유무역이나 값싼 음식물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공동체, 문화, 미각, 일 그리고 자연이라고.


<슬로 푸드> -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먹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다소 거창하게 말한다면, 슬로 푸드란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을 통해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천천히 되묻는 작업이다. 자신과 친구, 자신과 가족, 자신과 사회, 자신과 자연, 자신과 지구 전체의 관계를 말이다.


<생산한다 - 기다린다> - 우리는 생산자가 아니라 대기자일 뿐이다.


식탁에는 여러 다양한 시간들이 혼재해 있다. 흙 속의 무수한 미생물이 식물을 키우는 시간, 계절마다의 바람과 비, 벌레들의 시간, 비가 땅 속에 스며들면 식물의 뿌리가 그것을 빨아올리는 시간, 지형이나 기후, 식생, 생물의 성장에 맞추어서 그에 따라 적절하게 베풀어지는 농부들의 시간, 그들의 삶의 리듬, 그리고 음식물이 도시로 운반되는 유통의 시간, 조리와 숙성의 시간, 그 먹거리를 가족과 친구들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천천히 즐기는 시간, 또 그러한 음식은 제단에 바쳐지기도 함으로써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과의 시간에도 연결되어 있다.

상대가 자연이든 사람이든,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게 하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 요컨대 함께 살아가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왜냐하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주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농업 - 농사> - 농업이 잃어버린 생명의 시간이, 농사에는 아직 흐르고 있다.


산업으로서의 농업이 현대인이 생존에 있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농사를 회복하는 일 역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산업사회의 ‘더 빠르게, 더 크게, 더 강하게’라는 신화가 깨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단지 아직은 그것을 대체할 만한 다른 이야기를 자신들이 만들어 갈 수 있을지, 혹은 만들어 가도 좋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농촌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의 무리는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곳곳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씨앗> - 종자를 보존하는 일은 생태계를 지켜 내는 일이다.


종자 보존 운동이란 각각의 종자가 갖고 있는 고유한 시간을 존중하는 일이다. 종자에는 긴 시간 속에서 배양되어 온 각 지역의 기후, 토양, 미생물 등과의 관계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씨앗을 뿌리고 기르고 다시 씨를 거두고 계속해서 보존해 온 수세대에 걸친 농민들의 지혜와 삶이 담겨 있다. 그래서 종자를 보존하는 일은 생태계의 시간과 문화의 시간을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다.


<잡일> - 잡스러움을 허용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다.


지금 세계의 가치관과 라이프 스타일의 대전환 속에서, 우리는 바구니 속에 던져 넣었던 것을 다시 하나하나 끄집어 내서 살펴보고 있다. ‘잡스러움’이야말로 그것들의 키워드인 셈이다. 생태계의 잡초, 숲속의 잡목, 농업과 먹거리의 잡곡처럼. 잡담, 잡음, 잡화, 잡학, 잡지, 잡종, 잡념 등과 같은 일이나 사물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스산한 것이 될까. 조잡하고 잡다하고 번잡하고 복잡한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다.


<경쟁 - 어울림> - 함께 살아가고 사랑하는 일이 점점 어려운 일이 돼 가고 있다.


삶의 보람이란 가족 간의 단란함이나 공동체와 같은 누리는 즐거움 혹은 친구나 연인과 보내는 느긋한 - 생산성과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면 무익하게만 보이는 - 시간 속에 있는 게 아닐까. 어쨌든 함께 살아가고 사랑하는 일이 이제는 경쟁에 떠밀려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돼 가고 있는 듯하다.

‘경쟁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에서 놓여나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장소로서의 사회에서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다.


<슬로 러브> - 사랑이란 본디 시간을 포함하는 일이다.


육아, 사회화, 교육 등은 모두 시간이 걸리는 느린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에서의 느림만은 아니다. 사랑이란 본래 시간을 포함하는 일이다. 그것이 본질이기에 시간을 절약하거나 속도를 높이거나 효율화하는 일은, 그것의 본질을 훼손시킬 수밖에는 없는, 그야말로 ‘가장 비효율적인 프로세스’일지도 모른다.


<공포 - 안심> - 공포라는 산의 정상에 안심은 없다.


경쟁 사회를 떠받치는 기본적인 정서가 바로 공포다. 공포에 사로잡힌 어른들은 아이들을 경쟁의 장으로 내몰지 않을 수 없다. 흘러넘치는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학원에 보내고 수험 공부를 독려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게 하여 자신의 아이들이 뒤쳐지지 않도록, 남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애를 쓴다. ‘더욱더 열심히’가 그들의 구호다. 안심이나 자기만족 따위는 금기사항이다. 안심은 방심의 근원이며, 자기만족은 자기 타락의 시작이니까. 지금의 자신에 만족하면 끝장이며, ‘지금 여기’는 뛰어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전통사회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안심은 풍족했다. 근대사회는 이러한 안심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고, 자유와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도록 부추겼으며, 그 너머에 도달해야만 안심이 있는 것처럼 믿게 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얻었지만 도저히 얻지 못한 것도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안심이다. 슬로 라이프란 바로 이러한 안심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편리함 - 즐거움> - 편한 것이 반드시 즐거운 것은 아니다.


편리함의 가장 큰 문제는 공해와 환경 파괴다. 사람들은 편리함이 우리들의 생존 기반인 생태계를 훼손시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편리함은 그것을 향유하는 우리들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그 결과 마음과 몸의 건강을 상하게 하고 살아가는 즐거움을 빼앗는다.

편한 것이 반드시 즐거운 것은 아니다. 즐거운 일이 때로는 어렵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하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역시 ‘즐거움’과 ‘편리함’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빠른 쾌락을 손에 넣기 위해서, 느리고 깊은 즐거움과 편안함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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