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글 뒤에 숨은 글

샌. 2005. 12. 6. 15:59

‘글 뒤에 숨은 글’은 최근에 읽은 김병익 산문집이다. 평론가, 출판인으로 살아온 저자의 자서전적인 글모음인데 내용이 진솔하고 담백해 잔잔한 감동을 받으며 읽었다.

내용 중에서 부러웠던 것은 저자의 독서 편력에 대한 고백인데 초등학생 시절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이 책밖에 없었고, 그래서 많은 독서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5남매의 막내였다 보니 집에는 형들이 읽던 책들이 많았고 여러 분야의 책들을 접하며 지적으로 조숙해졌고 고등학교 때는 ‘사상계’나 ‘현대문학’, 실존철학서들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내 경우를 보면 저자와는 정반대였다. 나는 5남매의 장남으로 형이 있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집에는 교과서 외에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것이 5, 60년대 농촌의 모든 집에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시 우리들은 시간만 나면 산과 들에서 뛰어놀 줄만 알았지 책을 읽을 줄은 몰랐다. 그런 지적 자극을 받은 환경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초, 중학교 시절에는 학교 도서관을 구경해 보지도 못했다. 관심이 없어서 이용을 안했는지, 아니면 당시는 도서관 자체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책을 구경하고 읽어야겠다는 욕구를 느껴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에 가장 많이 본 것은 만화책이었다. 누군가가 만화책을 빌려오면 돌려가면서 탐닉을 했다. 중학교 때는 읍내 만화가게에서 한번에 수십 권씩 빌려다 보았다. 만화책의 효용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지적으로 가장 호기심이 많고 인생관이 정립될 시기에 대부분의 책읽기가 만화책이었다는 것은 지금 돌아보면 슬픈 일이다.

그리고 만화 외에 빌려본 것이 명랑소설이라고 불린 책들이었다. 그때 만화가게에는 만화책들과 함께 이런 책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억만이의 미소’라는 책은 내용은 떠오르지 않지만 제목만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 읽었던 것이 고작 만화책이나 그런 류의 소설들이었다.


또 하나 책에 얽힌 아픈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쯤의 어느 때였을 것이다. 참고서를 사러 읍내에 있는 스쿨서점에 들렀다가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책을 보았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 역경을 이겨내며 쓴 이윤복의 이 일기는 당시에 사람들에게 대인기였다. 돈은 없는데 책은 보고 싶고, 그때 무슨 마가 끼었는지 이 책을 몰래 윗옷 속에 집어넣고 나오다가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전혀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한 것이다. 담임에게 연락하고 경찰에 넘긴다는 주인의 말이 너무 무서워 눈물, 콧물이 범벅되도록 빌었다. 겨우 용서를 받았지만 대신에 서점 앞에서 몇 십 분 정도 손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그 창피는 담임이나 부모에게 사실이 알려지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는 그런 짓 말라며 훔치려던 책까지 주며 돌려보내주던 서점 주인이 무척 고마웠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가 혼이 났던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다른 사람의 실수를 어느 정도 이해해 주는 쪽으로 지금도 작용하고 있다. 벌 보다는 용서나 관용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뼈저리게 배운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의 초, 중학교 시절은 독서 경험에서 볼 때 텅 빈 공백기간이었다. 고등학교는 서울로 진학하면서 책과 접할 여건은 훨씬 좋아졌지만 그때는 또 입시에 매달리느라 교양서적을 읽을 시간이 나지 않았다. 저자가 그 시기에 읽었다는 책들을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만날 수 있었다. 불과 몇 년의 차이지만 한 인간의 지적 발달의 과정에서 볼 때는 결코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인간의 지적, 정서적 품성에 어린 시절의 독서가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책읽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지금도 1주일에 한 권 정도는 읽는 편이다. 만약 내 어린 시절에 가까운 주위에서 쉽게 책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자신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고의 깊이나 폭이 지금보다는 더 깊고 넓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방대한 독서 경험은 나에게는 부럽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 집 아이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탓에 아이들은 많은 책 속에서 살았다. 지금은 책을 많이 버렸지만 한때는 거실 벽이 온통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아빠의 책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중에 대학생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참으로 기이하게 느껴졌다. 도리어 책 과잉 속에서 질려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독서량이라는 것은 환경 보다는 개인의 타고난 바탕, 즉 내적인 독서욕구와 더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학생 시절의 독서 경험이 한 인간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데 큰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나의 학창 시절의 독서량이 빈약하고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지금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리고 내 자식에게도 다른 무엇보다 제대로 된 책읽기 지도나 그에 대한 가르침을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부모로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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