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민중의 세계사

샌. 2005. 10. 31. 14:31

누가 일곱 개의 성문이 있는 테베를 세웠는가?

책에서 그대는 왕들의 이름을 발견한다네.

왕들이 바위 덩어리를 끌어 날랐는가?

그리고 몇 번이고 파괴된 바빌론,

누가 바빌론을 몇 번이고 일으켜 세웠는가?

건설 노동자들은 금으로 번쩍이는 리마의 어느 집에 살았는가?

만리장성이 완성되던 날 밤에 석공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위대한 로마는 개선문으로 가득 차 있다네. 누가 그것들을 세웠는가?

시저는 누구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는가?

수많은 찬양을 받은 비잔티움,

그곳에 있던 것은 궁전뿐이었는가?

전설의 아트란티스에서조차

대양이 도시를 삼켜버린 날 밤에 사람들은

물에 빠져서도 자기 노예들한테 고함치고 있었다네.


청년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네.

그는 혼자였는가?

시저는 갈리아 사람들을 무찔렀다네.

그의 옆에는 요리사도 없었는가?

스페인의 펠리페 왕은 자기 함대가 물 속에 가라앉았을 때 눈물을 흘렸다네.

눈물을 흘린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는가?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이겼다네.

그 말고 누가 이겼는가?


쪽을 넘길 때마다 등장하는 승리.

누가 승리자들의 연회를 위해 요리를 만들었는가?

10년마다 등장하는 위인.

누가 그들을 위해 대가를 치렀는가?


너무나 많은 이야기.

그만큼 많은 의문.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


‘민중의 세계사’(A People's History of the World, Chris Harman, 책갈피)는 이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민중 중심 또는 계급투쟁 중심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접해 온 왕들이나 위인들의 연대기 위주의 역사가 아니라, 민중들의 행동이 어떻게 세상을 변혁하고 바꿔왔는지를 다룬다. 지배 세력 중심의 역사 서술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역사인 셈이다. 원시공산사회에서 잉여가 생기면서 계층이나 문명이 발생하고, 문명의 번성은 대개 지배층의 착취를 낳으며 거기에 대한 저항과 바탕 경제의 붕괴로 문명은 몰락한다. 역사상 수없이 명멸한 문명들을 보는 저자의 관점은 대략 이렇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기 위한 열쇠라고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 이해는 필수적이다.

교과서 같은 지배층 중심의 고식적인 역사만 접해본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의 시각은 신선하고 충격적이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를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로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짙어졌다. 작은 문제점들도 있지만 결국 인류는 번영과 풍요의 시대로 나아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사실 20세기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통째로 변화시킨 격변의 시기였다. 지금은 산업자본주의 체제가 거의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에 비해서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판단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어떤 것들은 사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

굶주림은 세계 도처에 널려 있고, 부의 불균등 또한 점점 심화되고 있다. 경제적 풍요조차도 위기가 닥치면 어느 순간에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 90년대 중반에 우리가 겪었던 IMF 사태가 잘 설명해 준다. AIDS, 조류독감 등의 새로운 질병들도 인류를 위협한다. 과거의 제국주의 시대에나 봄직한 전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세계의 정치 상황에 따라 핵무기는 아직도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질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역사는 진보한다는 생각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인간이 만드는 역사란 것이 무척 지저분하다. 그리고 인류 여명기의 갈등이 본질적으로 똑 같은 채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도리어 대규모 전쟁이나 학살, 유혈 혁명은 현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피비린내를 풍겼다. 20세기는 살육과 야만의 시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엥겔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아직도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사회주의로 전진하느냐, 아니면 야만주의로 후퇴하느냐.”

역사는 이런 부조리와 야만을 안고, 계층간, 종교간, 민족간의 갈등을 안고 계속 진행 중이다.


책을 읽다가 보면 가끔씩 한국 관련 내용이 나온다. 800쪽이나 되는 책 중에서 전부 해봐야 두 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그것도 한국전쟁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민주화 운도과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 투쟁도 단 한 줄로 취급되고 있다. ‘이 시기 남한에서도 파업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는 ‘민중의 한국사’ 같은 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저자는 책의 끝에서 반체제 세력이 사회 변혁을 이끌기 위해서는 혁명적 조직이라는 결정체를 중요시한다. 오늘날의 노동 계급에게도 우선적으로 그런 결정체가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념과 생활에서의 순수함이 마땅히 지켜져야 할 것이다. 무슨 운동이든 제일 어려운 것은 조직과 그 구성원들의 타락을 막는 일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 질풍노도처럼 세계를 휩쓸고 있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은 다시 민중들의 몫이다. 구질서에 도전하고, 혁명을 통해 개인적 야망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려 했던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용기를 얻고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아일랜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제임스 코널리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책을 끝맺고 있다.


“유일하게 참된 예언자들은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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