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샌. 2005. 9. 20. 16:44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대화’는 말 그대로 대화 형식을 빌린 리영희 선생님의 인생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봄, 이 책의 출간을 기념해서 선생님의 강연회가 열렸을 때 직접 찾아가서 선생님을 가까이서 뵙고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책을 읽은 것은 한참이 지나 최근이 되어서였다.

700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한 번 손에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빨려드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더욱 깊어졌고, 무지몽매했던 과거의 내 부끄러운 현실의식과 역사의식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한 시대의 구성원인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해준다.

진실을 알고, 그 진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며, 또 진실대로 살기를 염원하는 한 용기 있는 인간의 모습이 여기에는 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 광복 후의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 군사독재를 거치는 ‘야만의 시대’에 사건들의 의미를 읽을 수 있는 통찰력과 온갖 억압에도 굴하지 않는 지조를 지키며 일생을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선생님처럼 살기는 어렵다. 그러기에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등불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한 인간의 가치는 그의 머리에서 어떤 사상이 나왔느냐보다 그의 실생활이 사상과 유리되지 않고 바르게 실천되었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정의를 외치는 사람이 뒤로는 불의와 타협하고, 애국을 부르짖는 사람이 뒤로는 사욕을 채우는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선생님의 외침 보다는 삶의 실제로 인하여 선생님을 더욱 존경하게 된다. 그에 대한 일화들은 이 책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또한 우리의 역사 인식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위치, 해방 이후 현대사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의 감춰진 배후를 시원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알게 모르게 극우 반공 세뇌 교육에 물들어 있었는지 선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여러 체제와 사회 현상을 연구하신 선생님의 인간관은 어떠할까? 역시 선생님도 인간의 근본 본성이 이기주의임을 인정하시는 것 같다. 책 어디에선가는 그런 관점으로 사회주의의 몰락을 설명하기도 하셨다.

인간의 본성 및 행동 동기가 철저히 이기주의에 기초한다는 것은 요즈음 나에게도 절실히 와 닿는 명제이다. 인간과 그 행동을 자세히 관찰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에 대한 확신은 굳어지기만 한다.


‘인간의 선천적 본성은 이기주의다. 후천적, 사회적 제도와 훈련 및 규율(discipline)은 그것이 지속되는 한도에서 어느 정도까지 이기적 본능을 억제할 수 있지만, 그 외적 강요는 영구적일 수 없고, 따라서 외적 조건만 이완되면 잠재했던 이기적 본능이 부활한다. 갓난아기가 물건을 독점하려 하고 다른 어린애와 나누지 않으려는 배타적 소유 본능이 인간의 본원적 속성을 증명한다. 장성하는 과정에서의 사회적, 법적, 제도적 제약과 도덕적, 종교적, 교육적 규율도 이 속성을 크게 수정하지 못한다. 인간 유전자 조작과 각종 생명공학으로 인간이 인간 아닌 생명체로 질적 변화를 하지 않는 한 영원히 그럴 것이다.’


선생님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체제는 어떤 것일까 하는 것도 궁금했는데 유럽식의 사회주의가 가미된 자본주의를 최선이라고 여기시는 것 같다. 한때 중국식 사회주의 실험을 상당히 기대하며 지켜보신 것 같은데 시대의 흐름은 순수한 사회주의의 생존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것은 선생님의 현실적이며 과학적인 태도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1988년에 광주항쟁 배후세력 논란과 대학생들의 미공보원 점거 사건에 대해 당시 릴리 주한 미국대사와 논쟁을 한 내용도 실려 있다.

릴리 대사가 한국 대학생들이 ‘히트 앤드 런’(치고 빠지기) 식의 ‘비겁한 수법’을 쓰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답한 글은 선생님의 재치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한국 대학생들이 ‘히트 앤드 런’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을 비겁하다고 비난할 때 아마도 미국 서부 활극에서 등 뒤에서 쏘는 것을 금기로 삼는다는 소위 미국의 ‘영화윤리강령’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 대학생들은 미국인들이 서부를 점령, 통치하던 시기에 인디언들에 대해서 결코 공정하지도, 정정당당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미합중국은 강대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상대방을 ‘히트’하고 나서 ‘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런’하는 사람들을 모멸하는 시선으로 비난하는 것은 강한 자의 논리입니다...... ‘Strong and powerful’ 국가인 미합중국은 어디서나 ‘히트’하고 난 다음에는 그 자리에 stay, 즉 머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약한 자들은 미국을 ‘히트’하고는 ‘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행동양식 사이에 어떤 도덕적 차이가 있을까요? 차이라고 한다면 오직 미국은 강하고 다른 상대는 약하다는 것뿐입니다.’


책의 뒷표지에는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이것은 선생님의 삶의 철학일 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선생님의 당부가 아닌가 여겨진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棄權)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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