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온 삶을 먹다

샌. 2012. 6. 1. 07:14

웬델 베리(Wendell Berry, 1934~ )는 미국의 시인이며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로 생의 대부분을 고향에서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다. <온 삶을 먹다>는 농업과 먹을거리에 관한 그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 시대에 대한 경고와 함께 인류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대안적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이 그런 실험적 삶을 살고 있다. 웬델 베리가 보는 위기의 시작은 인간이 땅을 이익 창출의 수단으로 보았을 때부터였다. 농민이 사라지고 농기업가가 등장하면서 우리의 삶은 근원적으로 뒤틀린 것이다. 그는 1950년대에 트랙터를 몰며 앞에서 일하는 노새의 느린 걸음을 보고 속을 태웠던 때를 안타깝게 기억한다. 기계와 생명의 경쟁에서 승자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일손을 줄이는 기계와 무한하고 값싼 화석연료의 세계가 등장했다.

웬델 베리는 전통적 의미의 '살림'을 강조한다. '살림의 경제'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다. 살림은 집에 있는 남자가 하는 일로, 이 남자는 가정에 매인 자로서의 구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물론 여자가 하는 안살림과도 결부되어 있다. 살림은 가장으로써 땅과 흙을, 집안의 식물과 동물을 돌본다는 뜻이다. 살림하는 가장 노릇을 한다는 것은 아껴 쓰고, 지키고, 모으고, 오래가게 하고, 보존하는 일이다. 또한, 살림은 우리와 우리가 사는 장소와 세계를 보존 관계로 이어 줌으로써 생명을 지속시키는 활동이다. 살림은 예로부터 농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는데, 산업농업은 이런 살림의 전통을 앗아갔다. 이것이 현대 문명이 초래한 위기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살림의 바탕에는 연민의 감정이 있다. 농사를 지으며 동식물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생명에게 정성을 들이는 것은 자연과 진실한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살림의 마음'이 무엇인지 테리 커민스가 소년 시절을 회고하는 글을 인용하며 보여주고 있다.

"지치고 더워하는 말에게 땀에 절은 마구를 벗겨주는 게 특별히 주목할 일은 아닐 것이다. 찬비를 맞으며 바깥에 서 있는 양에게 외양간 문을 열어주는 것, 닭에게 모이 몇 알을 던져 주는 것은 작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작은 일들이 자기 안에 쌓이면, 자기가 중요한 존재라는 걸 이해하게 된다. 신문에서나 보는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정말 중요한 존재는 아닐지 모르지만,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자기가 하는 일을 누가 썩 잘 알아주거나 관심을 가져 주는 건 아니지만, 자기 하는 일에 대해 속으로 좋은 느낌을 갖고 있으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 없다. 나는 혼자 소를 몰고 돌아올 때나 온종일 예초기에 앉아 있을 때, 내 자신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우리 가축이나 작물이나 밭이나 숲이나 텃밭 같은 게 모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속에 좋은 느낌이 들면서 나한테 어떤 일이 닥칠지에 대한 걱정은 별로 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건 '살림의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살림의 마음이 살아 있는 공동체로 웬델 베리는 아미시를 예로 든다. 아미시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농업을 중심으로 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미시는 종교나 공동체의 가치가 경제적 가치보다 우선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아미시 공동체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이런 원칙을 따르는 사회는 경영자나 주주나 전문가에게 착취당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이 사는 사회가 될 것이다.

1. 가족과 공동체를 지킨다.
2. 이웃과 함께 농사 짓는 방식을 고수한다.
3. 요리, 농사, 가사, 주택에 관한 기술을 대대로 이어 간다.
4. 기술의 이용을 제한하여, 이용 가능한 인력이나 태양광, 풍력, 수력 같은 무료 에너지원을 배제하지 않는다.
5. 농장을 작은 규모로 제한하여, 이웃과 의좋게 농사를 짓고 저출력 기술을 최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6. 앞서 말한 방식들로, 비용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한다.
7. 자녀가 가족을 떠나지 않고 공동체를 지키며 살도록 교육한다.
8. 농사짓기를 실용적인 기술이자 영적인 수양으로 존중한다.

웬델 베리가 주장하는 것도 결국은 가족농(소농) 중심의 작은 공동체다. 가족농이란 한 가족이 농사짓기 충분할 정도로 작으며, 고용한 사람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그 가족이 '직접' 농사짓는 농장을 뜻한다. 여기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시장에 내다 팔 작물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작물을 생산하는 동안에 해당 장소의 건강과 쓸모를 책임감 있게 지키는 것까지 포함하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농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사라졌다. 산업사회의 시스템이 가족농을 말살시킨 것이다. 인간이 땅에서 공장으로, 고향에서 타향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내몰리면서 건강했던 공동체는 파괴되기 시작했다.

웬델 베리는 '먹는 즐거움'이라는 에세이에서 도시인들에게 '책임 있게 먹기'를 권유한다. 책임 있게 먹는다는 것은 먹을거리가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먹을거리가 가지는 의미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먹는다는 게 농업적인 행위"인 것이다. 웬델 베리는 우리의 실천 지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먹을거리 생산에 가능한 한 참여한다. 뜰이나 베란다, 볕 드는 창가에 화분이라도 있으면 먹거리를 기른다. 자기 집 주방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퇴비로 만들어 거름으로 이용한다. 먹을거리를 조금이라도 직접 길러야만 흙에서 씨앗으로, 꽃으로, 열매로, 음식으로, 찌꺼기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에너지의 아름다운 순환을 알 수 있다.
둘째, 음식을 직접 조리한다. 요리를 직접 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과 생활에서 부엌살림과 알뜰살림의 솜씨를 되살리는 일이다.
셋째, 사야 할 먹을거리의 원산지를 안 다음, 집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산다. 지역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소비자가 먹을거리에 대해 알고 영향을 행사하는 가장 확실하고 참신하고 쉬운 방법이다.
넷째, 가능한 한 지역의 농부나 텃밭 주인이나 과수원 주인과 직거래를 한다. 직거래를 하면 소비자가 진 부담으로 번영을 누리는 도소매상, 운송업자, 가공업자, 포장업자, 광고업자 같은 이들을 모두 배제할 수 있다.
다섯째, 자기 보호의 차원에서, 산업화된 먹을거리 생산의 경제와 기술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이 배운다. 먹을거리에 첨가되는 먹을거리 아닌 게 어떤 것들이며, 그런 첨가물에 대해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는 얼마나 되는가, 등이다.
여섯째, 가장 모범적인 농사나 텃밭 가꾸기와 관련된 것들을 배운다.
일곱째, 먹을거리 종이 생기고 자라는 과정에 대해, 가능하면 직접적인 관찰이나 경험을 통해 배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접하는 이 시대의 담론들이 이미 웬델 베리에 의해 수십 년 전부터 말해져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온 삶'(좋은 삶)이란 건강한 농촌 공동체에서 적정 기술을 이용하여 지속가능한 농업을 하며, 이웃과 땅을 보살피고 살리며, 건실한 먹을거리를 즐기는 삶이다. 그 반대편에 산업농업, 삶의 기계화, 무지, 오만, 탐욕, 이웃과 자연에 대한 폭력의 세계가 있다. 이 책은 우리 각자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묻는다.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고,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불편한 책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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