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시험 감독을 한 어느 학부모의 소감

샌. 2011. 10. 14. 08:19

.... 일주일 전. 중간고사 시험 감독을 갔다. 3학년 한 줄, 1학년 한 줄 섞여 앉아 시험을 치렀다. 선생님은 교탁에, 그 대척점인 뒤 칠판 쪽에 내가 섰다. 종이 울리자 나란히 도열한 회색빛 등짝이 일제히 수그러진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나오는 판옵티콘 구조, 일망감시체제에서 감시자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게 됐다. 환절기라서 아이들이 코를 킁킁 거리고 기침을 해댔다. 다리를 떨고 몸을 비트느라 의자의 삐그덕거리는 쇳소리가 울렸다. 매캐한 사내냄새 자욱한 공간에 왠지 불길한 기운을 자아내는 음향효과들...

맨 뒷자리 덩치 큰 녀석은 뒷모습부터 남달랐다. ‘학교 싫어 공부 싫어 시험 싫어’를 온몸으로 발산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문이 빼곡한 영어 시험지를 받더니 앞뒤로 김을 굽듯이 두어 차례 뒤집어 훑고는 답안지에 기표를 시작했다. 3학년답게 관록이 느껴지는 민첩한 태도였다. 나름은 정성 다해 골고루 찍었다. 저러다가 다 틀리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는데 곧 엎드리더니 후두점퍼의 모자를 뒤집어쓴다. 좁다란 책상에 몸집이 흘러넘쳤다. 학교가 몸에 맞지 않는 아이. 그 아이를 기점으로 10분 지나고 20분 지나자 한 녀석 두 녀석 도미노처럼 푹푹 쓰러졌다. 2교시는 고3 교실 감독을 들어갔는데 시험 치르는 아이들보다 자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이 충격적인 모습에 나도 쓰러질 뻔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교실붕괴의 현장이구나.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본 기분이었다. 그것도 김기덕의 영화. 타협을 모르고 잔혹함의 궁극을 보여주고야 마는 그의 영화. 사람들은 창녀가 대학생이 되는 판타지를 꿈꾸고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믿고 위로 받지만 김기덕 영화는 그런 서비스가 절대 없다. 있는 그대로의 오장육부 다 터진 현실을 드러내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날 시험풍경은 지극히 김기덕의 영화적이었다. 만감교차. 우울범벅. 싱숭생숭. 왜 엄마들까지 시험 감독을 불렀을까. 시험 치르는 아이들이 없는데 무슨 시험감독을 하라는 건지 속상했다. 잠이나 편히 자라고 등을 다독여주라면 모를까 아무 할 일이 없다. 부정행위도 시험을 잘 보려는 의욕이 있을 때, 건강한 신체상태일 때 저지른다. 지금 아이들은 아무 의욕도 열정도 희망도 없다. 니체 말대로 ‘악행’은 생에 대한 권력의지가 있는 강자만이 저지를 수 있다. 의욕할 줄도 저항할 줄도 모르는 순치된 아이들. 겉은 잠잠하지만 속은 썩어간다. 느린 자살이 일어나는 힘의 과소상태가 딱 지금의 학교 풍경이다.

도대체 선생님들은 이 꼴을 어떻게 매일 바라볼까,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 왜 방치하는가. 학교는 웬만한 대학에 가는 애들을 위한 학원이고, 나머지는 희생양이다. 등록금 내는 기부천사다. 공부를 포기한 애들이 일시에 학교를 그만두면 어떻게 될까. 교사들 월급은 누가 주나. 소수정예반 입시교육에 디딤돌이 되어주는 아이들이 너무나 가여웠다. 그 부모들이 흘릴 땀방울이 너무나 아까웠다. 명색이 학교 간판을 달고서 인생의 중요한 시기 아이들을 맡아 놓고 당신들 이래도 되는 건지 교무실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현관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나마 시험시간에 기죽고 시들어 있던 아이들이 물에 담긴 꽃처럼 피어나서 생기지게 떠들고 웃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좀 가벼웠다. 공부 못해도 기죽지는 말라고 네 자신을 긍정하라고 ‘좋은생각’류의 하나마나한 말들을 막 쏟아내고 싶었다. 그 순간, 나의 값싼 연민을 중지시키는 초긍정의 응답이 왔다. 신발 갈아 신는 아이 점퍼 등에 새겨진 문구. ‘공부는 실수를 낳고 찍기는 기적을 낳는다.’ 하하핫.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명색이 시험 보는 날이라고 옷장에서 저걸 골라 입고 집을 나왔을 아이의 동선을 떠올리자, 뭔가 통쾌했다.

지난주와 이번 주가 고등학교 중간고사 기간이다. 대부분의 학교가 부정행위를 막는다고 교사 한 명에 학부모 한 명이 같이 감독을 한다. 수능 식으로 한 교실에 두 명이 감독으로 들어가는데 교사 수가 부족하다는 게 제일 큰 이유다. 어쩔 수 없이 계속되긴 하지만 학부모나 교사 모두 껄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위의 글은 한 학부모가 서울에 있는 모 고등학교 중간고사 감독을 하고 난 후의 느낌을 적은 것이다. 시험 보는 아이들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시험 시간은 그나마 가장 진지하고 분위기가 좋을 때다. 만약 이분이 실제 수업 장면을 봤다면 아마 쇼크로 졸도했을 것 같다.

시험 치르는 아이가 없는데 무슨 시험 감독을 하라는 건지 속상했다는 학부모의 마음이 아프게 다가온다.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학부모의 눈에 지금의 교실은 이만저만 실망이 아닐 것이다. 사실 교사들은 이제 만성이 되어 그런 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이분이 너무 화가 나서, 당신들 이래도 되는 건지 교무실에 가 따지고 싶었다는 심정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교사들도 할 말이 많다. 천방지축 아이들과 제 자식만 챙기는 부모 사이에서 교사들도 숨이 막혀 질식할 정도다. 내 교직생활 후반은 고민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이상한 체제 안에서 그저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부정행위도 시험을 잘 보려는 의욕이 있을 때 저지른다. 지금 아이들은 아무런 의욕도, 열정도, 희망도 없다. 의욕 할 줄도 저항할 줄도 모르는 순치된 아이들, 겉은 잠잠하지만 속은 썩어간다.’ 이분의 표현 그대로 한국교육은 지금 깊이 병들어 있다.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니라 도리어 죽이고 있다. 심성이 고운 아이일수록 지나친 경쟁으로 내상을 입고 방황하게 되는 사례를 많이 보았다. 가정, 학교, 우리 사회, 모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영혼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이 답답한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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