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청소부 베포

샌. 2005. 2. 16. 15:26

옛 수첩을 뒤적이다가 보니 ‘모모’에서 옮겨 쓴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에 띈다.


‘한 걸음 - 한 숨 - 한 번 비질’


‘모모’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청소부 베포 할아버지다.

베포 할아버지는 원형경기장에서 살고 있는 열 살 소녀 모모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작은 키에 허리는 구부정하고 흰 머리칼에 안경을 쓰고 있는데 초라한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그의 직업은 도로 청소부다.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뭐라고 물어봐도 대답 대신 웃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을 듣는데 어떤 때는 두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그만큼 그는 생각이 깊다. 대답이 필요 없다고 여겨지면 침묵을 지킨다. 그런 그를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 모모이다. 모모는 남의 말을 들어줄 줄 안다.

청소부 베포는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있는 큰 빌딩으로 나가서 빗자루랑 수레를 받아들고 거리를 쓸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가 거리를 쓸 때면 천천히, 그러면서 쉬지 않고 쓴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심호흡을 하면서,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비질을 한다. 한 걸음 - 한 숨 - 한 번 비질, 한 걸음 - 한 숨 - 한 번 비질. 이따금씩 일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겨 앞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는 곧 앞으로 나아간다. 한 걸음 - 한 숨 - 한 번 비질.


‘한 걸음 - 한 숨 - 한 번 비질’은 청소부 베포 할아버지가 일하는 방식이다. 그 말이 수첩에 적혀있는 것을 보니 젊은 시절에도 무척 인상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현대와 같은 속도의 시대에 한 걸음에 한 번 비질은 비난받을 짓일 것이다. 실제로 ‘모모’에서는 회색 도당들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빨리 빨리’병에 걸리게 한 후에 시간을 도둑질해 간다.

더구나 베포 할아버지는 중간에 한 숨까지 쉬는 여유가 있다.

현대의 가장 큰 병이란 바로 이 ‘한 숨’의 여유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 싶다. 너도 나도 속도에 중독되어 있다. ‘모모’ 식으로 표현하면 시간 도적들의 주술에 빠져있는 것이다. 서로 빨리 달음박질해 나가려고 다투는 군상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시 ‘모모’를 기억하며 느리게 사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한 숨의 여유를 통해서 우리는 베포 할아버지의 지혜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이 좀 더 숨차지 않을 것 같다.


“길 전체를 한꺼번에 생각하면 안 돼, 알겠니? 오로지 다음 한 걸음, 다음 한 숨, 다음 한 번 비질만 생각해야 돼. 이렇게 끊임없이 다음 번의 한 번 동작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기쁨을 누릴 수가 있어. 그게 중요한 거야. 그렇게 하면 자기 일을 잘 해 나갈 수가 있어. 그래야만 하는 거야.”

“문득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서 그 아득한 길이 닦여졌다는 것을 깨닫게 돼. 그전엔 어떻게 길이 이루어졌는지 못 깨달았거든. 그걸 알고 나면 우리는 숨이 차지 않게 돼. 그것이 중요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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