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늙은 호박은 아름답다

샌. 2004. 9. 18. 16:09

올 봄에 앞 밭에다가 호박 10여 포기를 심었다.

호박을 얻는 목적보다는 긴 줄기를 뻗어서 맨 땅을 덮어달라고,그래서 풀이 좀 덜 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심은 것이었다.

거름과 비료를 한두 번 정도 준 외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런대로 잘 자라주었다. 사람들이지나가면서 호박 참 잘 되었다고 하는 칭찬도 들었다. 올해 어떤 집은 호박이 거의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올해 심은 작물 중에서그런대로 만족하는 것이 이 호박이다.

그래서 호박잎도 따서 쪄먹고, 애호박도 눈에 띄는대로 따다가 맛있게 먹고 도시의 이웃에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때가 지나서 못 딴 호박들은 군데 군데 늙은 호박으로 되어 누워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이 편안하고 평화롭다. 가을의 풍요함이 저 누런 호박을 통해서도 느껴진다. 내 밭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늙은 호박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밭은 오전이면 노란 호박꽃으로 덮힌다. 누가 호박꽃을 못 생긴 사람에 비유했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그건 호박도 마찬가지다.

늙은 호박이 누워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런데 '늙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늙었다는 것은 완성의 의미 보다는 이미 한 물이 간 느낌, 또는 용도 폐기되기 전의 무용한 존재라는 뜻으로 쉬이 다가온다.

어떤 작물이나 생물에도 '늙은'이라는 말을 붙이면 가치가 떨어진다. 늙은 옥수수는 딱딱해서 못 먹고, 늙은 과일들은 싱싱하지 못하다. 집에서 애지중지 기르던 개도 늙으면 딱하고 불쌍해 진다.늙은 국회의원이라면 무슨 권모술수의 상징같고, 늙은 선생도 인기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나마 좀 나은 것이 늙은 농부일 것이다. 주름진 얼굴은 삶의 연륜과 농사일에 대한 지혜를 말해 준다. 그러나 이마저도 요즈음에는 젊은 농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늙은 호박이라고 하면 사정이 다르다. 밭에 편안하게 누워 있는 늙은 호박은 삶의 넉넉함과 가을의 풍요로움을 전해준다. 거기에는 애호박에서볼 수 없는 삶의 연륜이 빛나고 있다.

별로 손을 봐주지 못했건만 저절로 꽃 피우고 열매 맺고 느긋하게 늙어가는 저 호박을 대견하게 바라본다.

늙은 호박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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