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200분의 1

샌. 2004. 9. 12. 16:44

올 봄에 목화씨를 우연히 얻게 되었다.

한 웅큼 정도 되었는데 까만 씨에는 하얀 솜털이 붙어있었다. 그 보드라운 촉감이 옛날 고향집 뒤의 목화밭을 떠올리게 했다.

다시 목화를 만날 수 있겠구나 하며 꿈과 기대를 모아 밭에다 씨를 뿌렸다.

이웃 분들도 목화씨를 심었다고 하니까 무척 반가워했다. 나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목화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는 것을 그때 확인했다.

길이가 20m 정도 되는 고랑 세 개에다가 한 구멍에 두세 개씩 심었으니까 땅으로 들어간 씨앗만도 200개는 넘을 것 같다.

그러나 땅이 척박해서였는지 근 한 달이 지나서야 잎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얼굴을 내미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싹이 나온 목화는 캐내어서 좀더 거름진 땅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미 성장의 한계에 다달았는지 거기서도 잘 자라지 못했다. 따로 거름까지 주었건만 키가 10여 cm를 넘지 못했다.

얼마 전에 그 중에서 튼실한 놈을 상추를 뽑아낸 거름기가 많은 곳으로 다시 이사를 시켰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남은 목화가 고작 일곱 포기였다. 이제 키는 30cm 정도가 되었지만 몸체는 너무나 빈약하다.

어릴 적의 그 풍성하던 목화밭을 기대했었는데 지금은 나에게 넘겨진 목화씨에게 미안할 뿐이다. 주인을 잘못 만나 대부분이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몇 포기에서 꽃이 맺히다가는 떨어져 버리더니 드디어 하나에서 흰 목화꽃이 활짝 피었다.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쪼그려 앉아 꽃을 쳐다보는데 그 환한 자태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목화야, 미안하다. 내년에는 준비를 잘 해서 이렇게 고생하지 않도록 정성껏 돌봐주마."

200여개의 씨앗 중에서 꽃을 피운 유일한 하나 - 만약에 앞으로 뽀얀 솜을 만들고 씨를 맺어준다면 보물처럼 간직했다가 내년에는 풍성한 열매로 보답해 주고 싶다.

'참살이의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들녘  (2) 2004.10.03
늙은 호박은 아름답다  (1) 2004.09.18
배추를 심다  (0) 2004.09.05
흔들리니까 사람이다  (3) 2004.08.27
후회하면 안 돼!  (1) 2004.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