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마가리의 밤

샌. 2004. 8. 3. 22:30

산속의 밤은 깊어간다.

드문드문 보이던 농가의 불빛도 밤이 깊어가면서 대부분 꺼지고 인공적인 소리와 빛은 거의 다 사라진다. 다만 띄엄띄엄 있는 동네 보안등만이 여기가 사람 사는 마을임을 지켜내려는 듯 외롭게 빛을 뿜고 있다.

이 시간이 되면 완전한 어둠과 침묵이 동네를 감싼다. 도시의 밤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런 밤의 모습은 일견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침묵의 밤은 다정한 친구처럼 다가온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다정했던 친구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런 때는 촛불이 어울린다. 정교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전등이 필요하지 않다. 여름밤에 촛불 아래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 창문에 어린 흐릿한 그림자는 너무나 정겹다.

창문을 열고 누워 있으면 서늘한 바람이 잔잔한 풀벌레들의 노래 소리를 실어 온다. 또 뒷산에서는 늘 같은 음조의 산새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이 새는 누구를 부르는지 '쫏 쫏' 또는 '쫏 쫏 쫏'하며 꼭 두세 음절로 나누어서 운다.

밤이 더 깊어지면 벌레 소리도 잦아들고 새 소리도 그치며 정적이 찾아온다. 너무 조용해서 촛농이 흘러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기도 한다. 나는 마치 우주 공간에 홀로 나가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럴 때 내 방은 절대 어둠과 절대 침묵에 둘러싸인 작은 우주선이 된다.

도시에서는 열대야로 시달리는 시간이지만 이곳은 밤이면 문을 닫고 자야 할 정도로 기온이 떨어진다. 낮에도 거의 선풍기가 필요하지 않다. 문명은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 서늘한 냉방을 하기 위해 밖으로 뿜어낸 열기는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어제 밤에는 무심결에 밖을 내다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창문 아래 풀 속에서 반딧불이 두 마리가 반짝 반짝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산책을 나갈 때면 논 주변에서 반딧불이를 만나게 되는데 여름이 되면서 농약을 자주 뿌리는 탓인지 요사이는 동네에서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런데 그 반딧불이가 내 터로 찾아든 것이다.

주변이 지저분하다고 사람들은 제초제를 권했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몇 배의 품이 들어도 일일이 손 작업을 했는데 그 결과의 의미를 보는 것 같아서 반딧불이도 고맙고 또 나 자신에게도 대견한 마음이 든다.

하늘에서는 별이 반짝이고 땅에서는 반딧불이들이 반짝인다. 그래, 반딧불이의 반짝이는 빛은 잠시 하늘에서 내려온 별일지도 몰라. 내가 하늘의 별을 초대할 수도 있는 거야.
어떨 때는 깜빡 잠이 들었다가 방안이 너무 환해서 눈을 떠보면 어느새 떠오른 달이 내 얼굴을 간지리고 있다. 달빛이 이렇게 밝은 줄 이제야 다시 깨닫는다.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밖에 나서면 세상과 그 안의 모든 존재들은 달빛과 어우러져 내밀한 속삭임을 주고받는 것 같다. 왠지 바로 쳐다보기가 부끄럽다.

같은 빛이로되 달에서 한번 반사된 빛은 낮의 햇빛과는 질적으로 달라진 빛이다. 달이 빛에 마술을 건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낮에는 볼 수 없었던 존재의 숨겨진 본성이 달빛 아래서는 드러나 보일 것처럼 느껴진다. 낮에는 숨겨져 있던 것들이 밤이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작년이었던가 어느 귀농한 분의 강연에서 달빛에도 색깔이 있음을 발견하고 경탄했다는 말이 인상깊었는데 결국 도시를 떠난다는 것은 그동안 소중히 누려왔던 그 무엇을 버려야 되지만 대신에 이런 정신적 풍요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도시문명이 우리에게 약속한 꿈은 신기루일지 모른다. 풍요와 행복을 준다고 하는 달콤한 말들은 다 거짓말일지 모른다. 우리의 앞에는 왠지 혹한의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달빛은 그런 생각들마저 사그러지게 한다. 대낮에는 온갖 화려한 색깔로 자신을 드러내던 존재들이 달빛 아래서는 너와 나의 구별없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다.

사람의 얄팍한 생각은 끊어지고, 교교한 달빛에 잠겨 산속의 밤은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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