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어느 날의 일기

샌. 2004. 8. 9. 16:07

두 차례 소나기가 지나갔다.

이불과 옷들을 잔뜩 널어놓고 외출을 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뿔싸, 큰 일 났구나. 부리나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누군가가 곱게 개어서 처마 아래에 모아 놓았다. 천둥이 치기 시작하니까이웃 분이 미리 챙겨놓은 것이 틀림없다. 옆집이리라 짐작하고 찾아가 인사를 드리려니 아니라고 한다. 그럼 누구인가?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야 할텐데.....

저녁에 내린 소나기는 짧은 시간이지만 어찌나 세차게 퍼붓는지 도랑에는 순간에 불어난 물이 급류를 이루고 마당에는 흙이 패이면서 물고랑이 생겼다. 물길 정리를 하러 우의를 입고 밖에 나갔지만 이내 온 몸이 젖는다. 하늘이 심술을 부리는가 보다.

여기서 생활하면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물이다. 집 뒤의 공사한 터가 아직 지반이 다져지지 않아 빗물이 흙을 쓸고 내려온다. 그 토사가 하수관을 막고 넘쳐난 물이 동네길을 뒤덮어 작년에는 마찰도 많이 생겼다. 그리고 집 주변 경사진 곳도 잔디를 심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덮히지 않아 많은 비에는 감당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만 오면 걱정이다. 이럴 때는 비가 오던지 바람이 불던지 염려할 필요가 없는 아파트 생활이 부러워진다.

그런 점은 농부들도 마찬가지이다. 비가 오면 오는대로, 가뭄이 들면 드는대로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가 오면논을 둘러보고, 또는 삽을 들고 도랑을 지키는 모습을 창 밖으로 자주 본다.

그래서 시골 생활이란 도시와 달리 자연 변화에 민감해지면서 그것에 동조될 수밖에 없다는 걸 느낀다. 반면에 문명이란 자연과의 단절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해가 뜨고 지는 기본 현상조차 도시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도리어 밤이 낮보다 더 밝고 활동적이기까지 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일에서, 그리고 온갖가지 관계에서 해방되니 심신이 무척 평안하다.

사람과의 접촉도 최소한으로 하고 있다. 어떤 때는 전혀 사람과 만나지 않는 날도 있다. 물론 그럴 때는 완전한 침묵의 날이다. 무료할 때는 라디오가 친구가 되어 준다.

그러니 사람들은 각자가 하나의 외로운 섬이라는 정의에 자연스레 동의하게 된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무수한 사슬로 얽힌 관계였다.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 관계란 것이 먹이 사슬에 불과할지 모른다. 나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한 부분일 뿐이다.

시골이라고 인간 관계의 본질이 다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곳은 서로간에 상당히 독립적이다.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이 사람들과의 관계나 사회 조직에 의존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일을 통해서 대부분 충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계는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고, 개인으로서의 사람이 돋나보이는 것이다. 반면에 상당히 옹고집적인 측면이 강한 것은 유감이다.

아침, 저녁으로 햇볕이 약할 때 두세 시간 정도씩 일을 한다. 일이라고 하지만 놀이삼아 하니까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일 중에서 80%는 풀을 뽑는 것이다. 잡초라고 불리는 풀들은 왜 그리 생명력이 왕성한지 하루 밤만 자고 나면 벌써 '나 여기 있소' 한다. 생각 같아서는 그대로 두고도 싶지만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며 혀를 끌끌 차서 견딜 수가 없다.

낮은 빈둥거리는 시간이다. 책을 보다가 낮잠을 자다가 그리고 그냥 누워서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 이곳에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골치 아프고 신경 쓰이는 일들을 여기서만은 잊자고 다짐을 하며 지낸다.

가능하면 내 머리를 텅 비워두고 싶다. 현실 회피일지 모르지만 복잡한 일들일랑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두 주 뒤에는 다시 아등바등거리는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겠지만 내일은 내일 일이고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텅 빈 그러나 충만한 시간을 즐기고 싶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최적의 무대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위는 캄캄하고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리고 있다. 북쪽 하늘에는 거꾸로 걸려 있는 북두칠성이 보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도리어 충만한 하루가 된 오늘에 감사하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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