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샌. 2003. 10. 28. 09:41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 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그녀는 시대의 고통에 같이 아파한 시인이었다.
그런데 아깝게도 40대 초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벌써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세상은 예전 그대로이고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또 다시 반복되는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가을 숲을 본다.
상채기 없는 온전한 이파리는 없다.
비바람에 찢기고 벌레에 먹힌 상한 모습의 저 이파리들이 모여 만산홍엽 가을 풍경을 만들고 있다.

우리들 속에 숨어있는 영혼을 모두 다같이 드러내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
나에게서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 우리는 새로운 눈을 뜰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다 아파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는 위로를 받게 될까?
아파하는 영혼들끼리 서로 부등켜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될까?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직시하기가 두려운지도 모른다.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듣기가 무서운지도 모른다.
광야의 바람 소리를 떠나 풍요의 신기루를 그리며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로 아파하는 영혼은 아름답다.
세상과 연결된 영혼, 그 세상의 고통과 함께 하려는 영혼은 아름답다.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