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길 / 정희성

샌. 2003. 9. 15. 13:48

길(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시인이 `내 사람아` 라고 부른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한들무례는 아닐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사방이 온통 벽으로 둘러싸인 것 같은절망에 빠질 때가 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서 `내 사람아`하고 다정히 불러준다. 그 소리는 귀로는 들을 수 없는영혼의 울림일 수도 있다.
힘들고 지칠 때면 나에게는 늘 이 시가 떠오른다.
그러면 가장 좋은 사람이 다가와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자를 먹으며 / 이오덕  (2) 2003.10.08
자유 / 김남주  (0) 2003.09.29
飮酒16 / 陶淵明  (0) 2003.09.28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0) 2003.09.21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2) 2003.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