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나희덕

샌. 2012. 8. 26. 10:13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 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 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 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광주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우연히 후배 B를 만났다. 성체를 영하는 줄에 그가 서 있었다. 그만의 약간은 시니컬한 미소가 반가웠다. 후배와는 10여 년 전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서로 헤어진 뒤로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텃밭 딸린 집이 있어 주말이면 광주에 내려와 지낸다고 했다. 몇 마디 서로의 안부를 물을 시간밖에는 없었다. 전화번호를 묻지도 못했다. 성당 마당에 주차한 차를 빼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만나 자세한 얘기를 나눕시다, 하고 후배는 떠나갔다. 나도, 곧 만날 텐데 뭐, 하고 가볍게 보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배의 부음이 들려왔다. 황당하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날의 만남이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뒤로 미루지 말고 그때 당장 차 한 잔이라도 나누었어야 옳은 일이었다. 나로서는 아직 객지 같은 이곳에서 옛 동료가 옆에 있어 다행이다 했는데 그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나갔다. 그날 환하게 웃던 후배 부부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지금도 미사를 드릴 때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꼭 부근에 앉아 있을 것만 같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남긴 흔적이 크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심 / 손택수  (0) 2012.09.12
아내의 전성시대 / 임보  (0) 2012.09.01
이 슬픔을 팔아서 / 이정우  (0) 2012.08.18
가장 사나운 짐승 / 구상  (0) 2012.08.10
담쟁이 / 도종환  (0) 2012.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