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아내의 전성시대 / 임보

샌. 2012. 9. 1. 16:59

왜 법대생들이 그렇게 좋아했던가 몰라요

고시공부 하는 놈들이 공부는 않고 쫓아다니기만 했으니

 

아내의 회고담이 또 시작된다

한두 놈이 아니었다고 은근히 으스대는 투다

'법대생'이라는 말도 내 비위에 거슬린다

지금쯤 잘된 놈은 변호사가 되어 떵떵거리며 지내지 않겠는가

(하기사 못 된 놈은 복덕방에서 어정거리고 있겠지만)

 

키는 180도 넘은 멀대같은 놈들이 늘 따라다녔단 말이요

 

키가 180이라는 말에 또 야코가 죽는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대꾸도 않고 숟가락질만 해댄다

수십 번을 들은 얘기이므로 다 알고 있는데 무슨 미련이 있는지

오늘도 점심을 먹다말고 어떤 친구 얘기 끝에

그녀는 자신의 황금시절을 회고하고 있는 중이다

 

매일 대문 밖에까지 따라와서 어정거리니 어쩌겄오?

 

다음엔 삼촌이 나와서 쫓아보냈다는 얘기가 나올 것이다

그 다음엔 장인이 법대학장에게 전화를 해서

그놈을 혼내 주었다는 스토리가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맨 끝에 있다

 

아니, 그 멀대같은 놈이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충장로를 헤매고 있는 걸 본 사람이 있었다잖아요

 

말하자면 그 법대생이 상사병이 들어 실성했다는 얘기다

자신은 한 사내를 미치게 할 만큼 매력덩이였다는 메세지다

그 얘기를 한평생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고희에 올라선 저 노파 맺힌 한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만약 세월을 다시 거슬러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마도 아내는 180의 법대를 선택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이나 좀 가져와!

 

아내의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수저를 놓는다

 

- 아내의 전성시대 / 임보

 

 

왜 여자들은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할까? 여자들 기억 창고는 핵발전소보다 더 단단하게 지어진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보관하고 있는 품목이 있다. 전성시대와 눈물시대를 대표하는 레퍼토리가 꼭 있다. 심심하면 꺼내서 남편의 기를 팍팍 죽인다. 이제 좀 그만 해. 정말 지겹지도 않아? 그걸 어째 잊을 수 있어? 당신이 반성해.

 

아내한테도 십팔번이 있다. 주로 결혼 초기에 각인된 힘들었던 기억들이다. 버튼만 눌러지면 녹음테이프가 좔좔 돌아간다. 평화를 위해서는 동의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니 참지 못하고 고함이 터진다. 그러면 아내의 마음조차 이해 못 해주는 속 좁은 사내가 되어 버린다. 집안에 한참 동안 냉기가 돈다. 도대체 이런 실랑이를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시에도 나오지만 여자들은 비교를 잘한다. 가난한 시인이 못마땅해지면 옛날의 법대생이 떠오르는가 보다. 그때 그 남자와 결혼했다면 내 팔자가 이렇지는 않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후생에도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할 것이냐는 질문에 여자와 남자의 대답은 차이가 크다고 들었다. 그렇더라도 제발 옆집 남자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독이 잔뜩 올랐을 때는 가서 한 번 살아보라고 보내주고 싶다.

 

늙을수록 당신 마음은 자꾸 콩알만 해지네, 오늘도 아내한테서 들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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