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담쟁이 / 도종환

샌. 2012. 7. 25. 16:10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담쟁이 / 도종환

 

 

2009년에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이 시가 내 인생에서 꼭 간직하고 싶은 시 1위를 차지했다. IMF 구제금융 이후부터 이 시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위안과 용기를 주는 이런 시를 찾았을 것이다.

 

시인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교사에서 해직되고 언제 끝날지 모를 투쟁을 계속하던 시절이었다.

 

'답답해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 벽에는 담쟁이가 가득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저 담쟁이는 벽에 살면서도 저렇게 푸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보니 담이란 곳은 흙 한 톨도 없고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곳이 아닙니까. 저런 데서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어린 담쟁이는 얼마나 세상을 원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주위엔 산도 있고 숲도 있고 비옥한 땅도 널려 있는데 왜 우리만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하느냐고 얼마나 원망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원망만 하고 있었다면 담쟁이는 말라 죽었을 겁니다. 원망만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거지요.

 

뿌리로 벽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붙들고 있었던 거지요. 붙들고 포기하지 않았던 거지요. 나도 힘들지만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옆에 있는 다른 이파리들도 다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저렇게 손에 손을 잡고 있는 거겠지요. 자기만 살 길 찾겠다고 100발짝을 달려가지 않고, 100개의 이파리와 손에 손을 잡고 한 발짝씩 나아가느라 저렇게 느리게 가는 거겠지요. 정말 견딜 수 없이 힘든 날도 있지만 말없이 벽을 오르는 거겠지요. 나는 벽에 살기 때문에 성장 속도가 늦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텐데도 그 어려움을 과정하거나 떠들어대지 않고 말없이 그 벽을 오르는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믿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면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다른 이파리들과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며 벽을 오르는 거겠지요. 그래서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어 놓는 거겠지요.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나는 회의 서류 뒷면에 연필로 조그맣게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나 혼자 살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함께 손잡고 이 어려운 벽을 헤쳐나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반드시 벽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으면 힘으로 벽을 무너뜨리고 가면 됩니다. 피 흘리고 희생하며 싸워서 벽을 넘는 길입니다. 혁명적인 방법입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서 한 시대의 벽을 넘어가는 때도 있습니다. 영웅이 나타나거나 위대한 과학자나 의학자가 나타나서 벽을 넘게 해주는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멀리 우회해서 가는 길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 때나 혁명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구원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 나날의 일상에서 벽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벽을 벽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면서,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여,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꿀 수 있다면 담쟁이처럼 벽을 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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