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시치미떼기 / 최승호

샌. 2012. 7. 2. 11:26

물끄러미 철쭉꽃을 보고 있는데

뚱뚱한 노파가 오더니

철쭉꽃을 뚝, 뚝, 꺾어간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가래침

 

가래침이 보도블록과 지하철역 계단

심지어 육교 위에도 붙어 있을 때

나는 불행한 보행자가 된다

어떻게 이 분실된 가래침들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

 

어제는 눈앞에서 똥누는 고양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끝까지 똥누는 걸 보고

이제는 고양이까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수줍음은 사라졌다 뻔뻔스러움이

비닐과 가래침과 광고들과 더불어

도처에서 번들거린다

 

그러나 장엄한 모순덩어리 우주를 이루어놓고

수줍음으로 숨어 있는 이가 있으니

그 분마저 뻔뻔스러워지면

온 우주가 한 덩어리 가래침이다

 

     - 시치미떼기 / 최승호

 

시치미란 사냥매의 꼬리에 매어두는 인식표였다. 사냥매가 귀하고 비싸기에 남의 매를 훔쳐 시치미를 떼어버리고는 새 시치미를 붙여 자신의 매라 주장했다. '시치미를 뗀다'라는 말의 유래가 여기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너무 뻔뻔해졌다. 이젠 죄를 짓고도 당당하다. 수줍음은 더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어린 소녀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학교에 있었을 때 잘못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고 염치 없는 아이들 얼굴 보는 게 슬펐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그때 사람들은 너무 수줍음이 많아 탈이었다. 부끄러움이 많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수줍음은 사라졌다. 시에서 표현한 대로 '위대한' 수줍음이 되었다. 뻔뻔해지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포식자가 되었다. 짐승처럼 쫓고 쫓기며 살고 있다. 친구와도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치미떼기의 명수가 되어야 돈도 많이 벌고, 남보다 앞서나갈 수 있다. 꼭 이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해, 라는 의문이 자꾸 든다. 잃어버린 수줍음을 어디에 가서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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