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분홍색 연기

샌. 2013. 3. 27. 07:56

지난 13일에 새 교황이 선출되었다. 전임 교황이 생존한 상태에서 사임한 것이 특이했는데 바티칸 내부의 권력 암투 때문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구중궁궐 깊숙한 곳의 얘기라 어차피 추측성 기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새로 뽑힌 교황의 본명이 '프란치스코 1세'로 명명된 게 오히려 더 신기했다. 프란치스코(1181~1226)는 가톨릭을 대표하는 중세 시대의 성인이다. 철저한 무소유 정신으로 예수의 정신에 가장 일치하게 살았던 분이었다. 프란치스코의 평화와 생명의 영성은 가톨릭의 빛나는 자산 중 하나다. 가톨릭 신자는 존경하는 성인의 이름을 따라 자신의 본명을 짓는다. 교황도 마찬가지다. 교황직을 수락하면서 옛 이름을 버리고 존경하는 성인이나 전임 교황의 이름을 골라서 본명을 새로 짓는다. 그런데 성 프란치스코 이후 백 명이 넘는 교황이 있었지만, 프란치스코를 본명으로 삼은 교황이 이번에 처음으로 탄생했다. 반가우면서도 신기한 느낌이 드는 이유다.


신임 교황이 프란치스코라는 본명처럼 가난의 정신으로 돌아가 바티칸과 가톨릭을 개혁할지 기다려 볼 일이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새 교황의 연세도 이미 76세다. 추기경들이 워낙 노쇠하다 보니 선출되는 교황도 대부분이 70세 이상이다. 전임 교황도 78세 때 임명되었다. 사회로 치면 은퇴 시기가 한참 지난 나이에 가톨릭의 수장이 된다. 이래서는 가톨릭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바티칸은 아직도 무지한 시대의 유산을 화려한 전통인 양 낡은 외투처럼 걸치고 있다. 변화와 혁신을 하지 못하고 진리라는 껍질에 웅크리고 있다면 그 종교의 미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요한 23세 교황은 기적 같은 일을 하셨다. 이분 역시 77세에 교황으로 선출되셨지만 혁명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가톨릭 교회를 바꾸었다. 1962년에 가톨릭공의회를 개최하여 현대사회에 맞도록 가톨릭을 개혁한 것이다. 지금 성당에서 드리는 미사 형식도 이때에 개정된 것이다. 그밖에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음을 인정한 것, 다른 종교와의 화해, 개신교나 정교회를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부른 점, 평신도의 역할 강조, 권위주의 타파 등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가톨릭을 열린 종교로 변화시켰다. 아마 요한 23세가 아니었다면 가톨릭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은 여전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완고하게 고집하는 구시대의 교리가 발목을 잡는다. 대표적인 게 1870년에 결정된 '교황무류성(敎皇無謬性)'이다. 교황은 최고의 교사로서 신앙이나 윤리에 관한 문제를 가르칠 때 잘못을 범할 수 없다는 교리다. 지금이 신권국가 시대도 아니고, 차라리 교황도 연약한 인간임을 시인하는 게 더 낫다. 그 외에도 성모 마리아에 관한 내용 등 재고해 볼 여지가 있는 교리가 많다. 고해성사나 성체성사 역시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본다. 딱딱하고 완고한 군주 같은 종교가 아니라 모든 것에 개방적이고 열린 천주교를 만나고 싶다. 전에 다니던 성당에서 젊은 부제 신부님은 가톨릭이 예수님의 가난을 실천할 의지가 있다면 바티칸 지하에 소장한 보화와 문화재를 팔아서 가난한 나라에 돌려줘야 한다고 강론 중에 말한 적이 있었다. 교권 수호라는 권위를 버리고 낮은 자세로 섬기는 모습을 바티칸이 보여줬으면 좋겠다.


콘클라베가 열리는 동안 바티칸 광장에서 몇몇 여성들이 분홍색 연기를 피우며 항의하는 모습을 TV로 보았다. 교황이 선출되면 흰 연기를, 선출되지 못하면 검은 연기를 피우는 관례를 패러디한 것이다. 즉, 여성 교황이 선출되기를 꿈꾸는 분홍색 연기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여성은 사제가 될 수 없다. 예수도 남자로만 열두 제자를 뒀다는 궁색한 논리다. 이것 역시 시대에 뒤처진 구닥다리 고집이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은 '보편된, 공번된, 일반적인' 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로마 가톨릭이 과연 '보편'이라는 가치를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 이름에 걸맞는 가톨릭이 되기 위하여는 우선 여성이 사제로 진출할 수 있는 길부터 열어야 한다. 아마 제3차 바티칸공의회를 위해 아껴둔 카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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