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병에게 / 조지훈

샌. 2013. 4. 1. 12:54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生)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生)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地獄)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人生)을 얘기해 보세 그려

 

- 병(病)에게 / 조지훈

 

 

불교에서 인간은 사백네 가지 병을 몸 안에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병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다.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인간 삶의 한 과정이다. 날 찾아오는 병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상당히 중요하다. 건강이란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병과 조화롭게 지내는 것을 말하는지 모른다. 반면에 서양의학은 병을 적대적으로 대한다. 부정적이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투병(鬪病)이라는 전투적 용어가 이를 뒷받침한다.

 

시인은 병을 친구로 맞아들인다. 우울한 방문객이긴 하지만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을 가르쳐주는 고마운 벗이다. 안도의 숨을 돌리려 하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내 교만을 탓한다. 건방진 모습을 보이면 몹시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가슴을 헤치고 겸허해지면 그때야 나를 뿌리치고 떠나간다. 불교적인 질병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허리가 아파 며칠째 고생하고 있다.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 이 친구는 한 달간이나 날 괴롭히다 떠나갔다. 왜 이렇게 뜸한가 했더니 역시 잊은 건 아니었다. 잘 왔네 이 친구, 자네와 더불어 빈둥거리며 놀아보세. 그리고 지루해지거든 아무 때나 떠나가게나. 굳이 말리지는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