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쓸쓸 / 문정희

샌. 2013. 3. 18. 12:06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 글씨로 써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이윽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 쓸쓸 / 문정희

 

 

'쓸'을 조형적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재미있다. 위로는 산 두 개가 겹쳐 있고, 아래로는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형상을 하고 있는 글자다. 산과 강물만 있는 적막강산의 구도, 그래서 쓸쓸인가?

 

인생의 반쪽만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쓸쓸을 찾아 나서고 싶어진다. 외로움과 쓸쓸함은 미묘한 어감 차이가 있다. 외로움이 물리적 고독이라면, 쓸쓸함에는 발효된 고독의 뉘앙스가 풍긴다. 외로움이라는 칼로 삶의 껍데기를 벗겨 내면 쓸쓸이 얼굴을 내민다. 모든 인생은 쓸쓸하다. 사랑 속에도 쓸쓸함이 숨어 있다.

 

설익은 감을 씹으면 처음에는 떫지만 자꾸 씹으면 단맛이 나듯이, 쓸쓸도 그럴 것 같다. 감히 쓸쓸함을 사랑하고 싶어진다. 빛보다는 그늘에 들고 싶다. 거기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미지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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