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 손택수

샌. 2013. 3. 24. 09:09

자기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딱딱하게 이어지던 대화 끝에

여자후배의 입술 사이로 무심코

튀어나온 자기, 어

여자후배는 잠시 당황하다

들고 온 보험서류를 내밀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한순간 잔뜩 긴장하고 듣던 나를

맥없이 무장해제 시켜버린 자기,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무 때고

꽃잎에 이슬 매달리듯

혀끝에 자기라는 말이 촉촉이 매달려 있는가

주책이지 뭐야, 한번은 어머니하고 얘기할 때도 그랬어

꽃집 앞에 내다논 화분을 보고도

자기, 참 예쁘다

중얼거리다가 혼자서 얼마나 무안했게

나는 망설이던 보험을 들기로 한다

그것도 아주 종신보험으로 들기로 한다

자기, 사랑에 빠진 말 속에

 

-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 손택수

 

 

시가 전하는 현장으로 들어가 보면 무척 재미있다. 보험서류를 들고 옛날 여자후배가 찾아온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이때 여자후배의 입에서 무심코 '자기'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과거 둘 사이의 관계를 짐작케도 한다. 망설이던 남자는 자기라는 말 한마디에 무너진다. 여자후배도 무척 민망했던가 보다. "주책이지 뭐야, 한번은 어머니하고 얘기할 때도 그랬어. 꽃집 앞에 내다논 화분을 보고도, 자기 참 예쁘다, 중얼거리다가 혼자서 얼마나 무안했게." 여자의 변명도 귀엽다. 남자는 종신보험을 들기로 한다.

 

자기, 라는 말은 다정하면서 사랑이 느껴진다. 여자후배처럼 꽃에 불러주어도 잘 어울리는 말이다. 시집간 첫째는 결혼한 뒤에도 여전히 남편을 오빠라 부른다. 그것보다는 '자기'가 훨씬 더 나아 보인다. 서양으로 치면 '하니(honey)' 에 해당하지 않을까. 자기, 라고 부르며 찾아와 줄 여자후배 하나 없는 게 아쉽다. 그런다면 종신보험 하나쯤은 기쁘게 들어줄 텐데....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석 부른다 / 이태선  (0) 2013.04.08
병에게 / 조지훈  (0) 2013.04.01
쓸쓸 / 문정희  (0) 2013.03.18
전쟁광 보호구역 / 반칠환  (0) 2013.03.13
낯선 곳 / 고은  (0) 2013.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