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나는 누구인가?

샌. 2013. 4. 9. 08:57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가 장발장의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독백이다. 그는 자베르 경감을 피해 신분 세탁을 하고 시장이 되어 살아간다. 그러다가 다른 데서 장발장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하게 된다. 자신이 진짜 장발장이라고 고백하면 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모든 것을 잃는다. 숨기면 시장직을 유지하며 잘 살 수는 있으나 다른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된다. 양심의 갈등으로 번민할 때 그가 스스로 묻는 말이 이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는 한 인간이 성장하면서 새로운 자아 인식에 눈뜰 때 던지는 질문이다. 사춘기 열병의 원인도 결국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 때문이다. 평생을 두고 고뇌해야 할 화두를 받는 것이다. 그것은 질문으로 주어질 뿐 해답이 없다. 이 세상에는 "나는 누구인가?"를 열심히 묻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 확신에 차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못한다.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경감 같은 사람이다. 법과 질서, 정의의 수호자라는 자기 확신으로 그는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한다. 하층민들의 가난하고 고달픈 인생은 그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범법자를 잡아내고 처벌하는 것이 그가 믿는 하느님의 뜻이다. 자베르 경감이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당위성이 없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는 장발장을 보며 바위처럼 굳은 그의 마음도 변한다. 끝까지 장발장을 추적하지만 이미 신념은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그를 깨운 것은 장발장의 용서와 사랑이다. 장발장이 성당 신부의 관용을 통해 새사람이 되었듯 자베르 경감도 같은 과정을 밟는다. 그의 번민이 시작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물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확신은 위험하지만, 번민은 옳은 길을 갈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정의다, 라는 단정은 미혹에 빠지는 길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사람은 고민하고 회의하는 사람이다. 그 질문은 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해답이 없어도 사람을 살린다. 회의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다. 자베르 경감은 센 강으로 몸을 던졌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철학적 고민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힘이다. 장발장은 "나는 누구인가?"를 계속 물었다. 결국 그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연민의 교감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 진지하고 치열한 질문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꾼다. 그때에야 자아 혁명만이 아니라 사회 혁명도 가능해진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을 회피하지 않을 때 세상을 바꿀 힘이 나온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시민 혁명군의 밝고 우렁찬 합창이 들린다. 내일은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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