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사람은 왜 일을 하는가?

샌. 2013. 4. 22. 08:56

"다 먹고 살기 위해서지." "돈만 있으면 일 안 하고 놀 텐데." 농담하듯 흔히 내뱉는 이런 말들이 빈말이라는 건 퇴직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유유상종이라고 아무래도 현역에서 떠난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의 고민이 마땅한 일거리에 관한 것이다. 먹고 사는 것과는 별로 연관이 없는 사람들인데도 여전히 일을 찾는다. 여기서 일이란 어딘가에 소속되고 규칙적으로 출퇴근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로또에 당첨되면 사람들은 일을 안 할까? 그래도 대부분은 규칙적인 일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역시 여유가 생긴다면 일없는 공허를 견디지 못 할 것이다. 평소에 열심히 일 한 사람들이 일의 관성에서 벗어나기는 더 어렵다. 노는 것이나 산에 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하며 시간의 공백을 두려워할 게 뻔하다. 사람은 왜 일을 해야 하는가?

 

일에는 돈보다 더한 의미가 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일이 나와 타인, 나와 사회와의 관계를 맺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일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타인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자아 존중의 필수 조건이다. 일은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해주는 윤활유다. 고정된 일이 없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을 낳는다. 그래서는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없다. 은퇴한 사람 중 다수가 자신을 못난, 사람 노릇 못하는 인간으로 자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직한 남편이 당장 아내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는지 보면 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부처님처럼 깨달은 사람이나 부르짖을 수 있는 말이다. 사람이 느끼는 최대의 공포는 관계의 두절이다. 외톨이가 된다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그동안은 일이 자연스레 세상과의 관계를 맺어주었다. 아무리 힘들고 고되어도 일에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우리의 의식은 노동은 귀하다는 세뇌작용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일이 주는 달콤한 열매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일수록 일 중독에 빠지기 쉽다.

 

일의 부정적 측면이 여기에 있다. 일에 몰두하면 존재의 불안을 잊게 된다. 내적 성찰의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다. 내면이 불안한 사람일수록 일에 매달리는 이유다. 현대 사회가 왜 이렇게 젊은이들을 일과 성취에 내모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딴생각을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경쟁력을 내세우며 회사는 살인적으로 일을 시킨다. 단란한 가정생활은 아예 꿈도 못 꾼다. 인간이 삶의 의미에 대해 눈을 돌리면, 왜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면, 회사는 노동자를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없다. 회사 관리자가 고의적으로 그렇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세상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 있다.

 

사회로부터 명령받은 일에 로봇처럼 충실하다는 건 결코 바람직한 게 아니다. 열심과 열정을 강조하며 다그치는 사회는 사실 위험하다. 왜, 라고 묻는 것은 불온시 된다. 열심히 살았는데 퇴직하고 나니 인생이 허무하다고 넋두리하는 것은 본인이 주체적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에 매몰되었을 뿐 자신의 인생을 살지 않았다.

 

장수 시대라고 하면서 이젠 노인마저 일을 하라고 부추긴다. 가만있는 걸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투다. 내가 아는 사람은 집에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무언가 일을 찾아 밖에 나가서 돌아다닌다. 강남에 사는 부자지만 점심은 구청에서 주는 2천 원짜리 식사를 한다. 하여튼 스케쥴을 바쁘게 만들어놓고 산다. 낮에 집에서 빈둥거린다는 건 그분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다. 그것도 하나의 살아가는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죽을 때까지 개미로 살겠다는 발악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열심히 사는 것도 문제다.

 

인생 후반부에 일에서 떠나게 되는 건 이때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보라는 축복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힌두교에서 인생의 단계로 나눈 50세 이후의 임서기(林棲期)는 의미심장하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은퇴 뒤의 삶을 관조기(觀照期)로 여기고 사는 것이다. 밖으로 향하던 관심을 안으로 돌리는 시기다. 좀 덜 움직이고, 대신에 좀 더 사고하라는 얘기다.

 

인간은 일을 통해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지만, 또한 인간은 일에서 초월 되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단계를 지난 은퇴 이후가 그래서 중요하다.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회복할 기회가 바로 은퇴 시기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누구가 아닌 나를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자면 관성적인 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눈 뜨면 밖으로 나가야 하고, 아파트 경비원이라도 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면서 애처롭다. 사람은 왜 일을 하는가? 여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인생 후반기는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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