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여인의 노래 / 이옥

샌. 2013. 4. 23. 11:50

一結靑絲髮

相期到蔥根

無羞猶自羞

三月不共言

 

검은 머리 한데 맞대고 하나로 맺어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자고 했지요

부끄럽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부끄러워져

낭군에게 석 달 동안 말도 못했지요

 

 

四更起梳頭

五更候公모

誓將歸家後

不食眠日午

 

4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5경에 어른들께 문안드렸다

맹세하노니, 친정에 돌아간 뒤

먹지도 않고 대낮까지 늦잠 자리라

 

 

桃花猶是賤

梨花太如霜

停勻脂與粉

농作杏花粧

 

복사꽃은 너무 천박하고

배꽃은 너무 쌀쌀맞네

연지분 화장을 잠시 멈추고

살구씨 화장을 하네

 

 

歡言自酒家

농言自倡家

如何汗衫上

연脂染作花

 

당신은 술집에서 왔다고 말하지만

기생집에서 온 줄 전 알아요

어째서 속적삼 위에

연지가 꽃처럼 물들었나요

 

 

亂提羹與飯

照我面門擲

自是郎變味

妾手豈異昔

 

국그릇 밥그릇 마구 집어

내 얼굴을 겨냥해 던지네

낭군님 입맛이 변한 거지

제 솜씨가 어찌 전과 다르겠소?

 

 

巡邏今未散

郎歸月落時

先睡必生怒

不寐亦有疑

 

순라꾼 지금쯤 해산했을까?

서방님은 새벽달 져야 돌아오지

먼저 잠들어도 분명 화를 내고

자지 않고 있어도 의심할 테지

 

 

이 시만 보면 여성이 쓴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여인에 대한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그러나 이옥(李鈺, 1760~1812)이라는 남자 문인의 시다. 조선 후기에 살았던 이옥은 자유로운 정신과 얽매이지 않은 문체로 뛰어난 글을 많이 쓴 천재적인 문사였다. 딱딱한 유교 이념에 갇혀 있던 조선 사회에서 이런 정신이 태어났다는 게 기이하게 여겨진다. 혜원 신윤복이 기존의 그림의 틀을 깼듯이, 이옥은 고리타분한 사대부의 글쓰기를 깨트렸다. 이 시에서 이옥은 섬세한 여인의 정서를 보여줌으로써 가부장적인 조선 사회를 고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라는 산문 중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정릉동 어구도 멋지고, 동성(東城) 바깥 평사(平沙)에서 일단의 무리가 말을 내달리는 것을 본 것도 멋졌다. 사흘 만에 다시 도성에 들어와 취렴방 저자에 붉은 먼지가 일고 수레와 말이 빈번하게 다니는 것을 보는 것도 멋지다. 아침에도 멋지고 저녁에도 역시 멋지다. 날이 맑아도 멋지고 흐려도 멋지다. 산도 멋지고 물도 멋지다. 단풍도 멋지고 바위도 멋지다. 멀리 조망하여도 멋지고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 멋지다. 부처도 멋지고 스님도 멋지다. 비록 좋은 안주는 없어도 탁주라도 멋지다. 절대가인이 없더라도 초동의 노래만으로도 멋지다. 요컨대 그윽해서 멋진 것도 있고, 상쾌하여 멋진 것도 있고, 활달해서 멋진 것도 있고, 아슬아슬하여 멋진 것도 있고, 담박하여 멋진 것도 있고, 알록달록하여 멋진 것도 있다. 시끌시끌하여 멋진 것도 있고, 적막하여 멋진 것도 있다. 어디를 가든 멋지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함께하여도 멋지지 않을 것이 없다. 멋진 것이 이렇게도 많아라!

 

'멋지다[佳]'를 반복해서 사용해 정말 멋진 문장을 만들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까지 들뜨게 만든다. "멋진 것이 이렇게도 많아라!" 이옥은 정조의 문체반정에 걸려 그런 문체로 글을 쓰지 말라는 명령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은 아웃사이더였다고 한다. 그는 출세보다는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멋진 사람이다. 그의 글이 실린 문집 이름이 <이언(俚諺)>인데 '속되고 상스러운 말'이란 뜻이다. 뭔가 근엄한 제목을 찾는 게 보통이거늘 제목부터 이옥답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의 문장을 좀더 찾아 읽어봐야겠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 논 / 이시영  (0) 2013.05.07
잃어버린 것들 / 박노해  (0) 2013.04.27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 / 이화은  (0) 2013.04.16
출석 부른다 / 이태선  (0) 2013.04.08
병에게 / 조지훈  (0) 2013.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