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봄 논 / 이시영

샌. 2013. 5. 7. 08:02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 봄 논 / 이시영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듣기 좋고,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 보기 좋다고 옛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논에 들어간 물이 벼를 키우고, 그 곡식이 생명을 기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땅의 차가운 물과 하늘의 뜨거운 불이 만나 나락을 만드는 것이다. 알갱이 하나하나는 곧 물과 불의 결합이다.

 

어렸을 때는 논두렁을 따라 잘 다녔다. 개울로 놀러 나갈 때는 논두렁을 지나야 했고, 학교에 오갈 때도 지름길이 논두렁이었다. 논두렁을 따라 걸을 때면 그 폭신폭신한 감촉이 좋았다. 좁아서 조심해야 했지만 장난꾸러기들은 일부러 뛰어가는 스릴을 즐겼다. 논두렁에는 한두 개 쯤 물이 흐르는 통로가 있었다. 그런 데서는 폴짝 뛰어넘어야 했다.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졸졸거리며 흘러내리는 그 물소리가 어린 귀에도 정겨웠다. 이 시를 읽으니 유년의 봄 논 풍경이 떠오른다. 특히 모내기하는 날은 잔칫날처럼 흥겨웠다. 어린 눈에 농사짓는 고단함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다. 이제는 봇물 대는 감격도 사라졌고, 사람 대신 기계가 연기를 뿜으며 들판을 누빈다. 더는 발목에 물을 적실 필요도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앞에도 논이 있지만 시와 같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농약과 화학 비료에 찌들어 생기가 빠져 나간 모습이다.

 

이 시는 감각적 표현이 무척 재미있다. "앗 뜨거라!" 외치는 소리는 마치 열탕에 들어가면서 "아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논도 물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원초적 생명력이 통통 튄다. 모든 생명은 하나로 얽혀 있다. 땅이 살아나야 사람도 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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