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직업병

샌. 2013. 5. 17. 08:03

얼마 전부터 손목과 손가락이 아프기 시작했다. 원인을 추리해보니 책 보는 습관 때문이 아닌가 판단된다. 게으르다 보니 책을 볼 때는 주로 누워서 두 손으로 떠받치고 본다. 팔과 손가락에 큰 힘이 들어가야 하는 자세다. 편한 것만 찾다 보니 팔이 고생을 한다. 그래서 요사이는 배 위에 베개 두 개를 올려놓고 그 위에 책을 놓고 본다. 그래선지 통증이 많이 완화되었다. 게으른 백수의 직업병이다.

 

또 손가락 중에서는 오른손 둘째 손가락이 제일 아프다. 이 원인도 추리해 보니 너무 자주 마우스를 클릭한 탓인 것 같다. 하루에 서너 시간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보고, 필요한 정보를 찾는데 그 정도 시간이 든다. 그러다 보니 손가락 한 개가 혹사를 당한 모양이다. 업무상 종일 컴퓨터를 다루어야 하는 사람은 어떨까 싶다. 컴퓨터를 쓰지 않을 수는 없고, 지금은 불편하긴 하지만 셋째 손가락을 주로 사용한다. 백수가 되니 몸의 기능도 점점 퇴화한다.

 

촌에서 살다가 어쩌다 서울에 들어가면 너무 복잡하고 어지러워서 짜증이 난다. 특히 사람들과 부딪히는 게 영 질색이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만원일 때는 공포 수준이 된다. 전에 출퇴근할 때는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백수가 되어 조용하고 느긋하게 지내다 보니 그런 환경이 적응이 안 된다. 시골에 살던 사람이 서울에 오면 공기가 답답해 못 살겠다고 한 말이 이젠 이해가 된다. 나는 공기보다는 정신이 산만해져서 심기가 날카로워진다. 이것도 백수가 된 직업병이라 할 수 있다.

 

백수라고 모두 나 같지는 않을 것이다. 바쁜 백수도 많다. 어제 만난 선배는 배우러 다녀야 하는 곳이 하루 평균 세 군데다. 얼마 전부터는 거기에 요리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래서 뭔 약속을 하려 해도 도대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배의 신조는 바빠야 젊게 산다는 것이다. 단임골에 가기 위해서 J가 5월 마지막 주의 내 일정에 대해 물어왔다. 사실은 물을 필요도 없다. 내 일정표 달력은 텅텅 비어 있다.

 

그래도 나는 할 일 없고 게으른 게 좋다. 온전히 내 체질에 맞다. 제대로 된 직업이 있고 열심히 사는 사람만 직업병에 걸리는가, 그렇지 않다. 나같이 게으르고 쓸모없는 백수도 직업병이 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면서 나는 내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귀차니즘도 적당하면 귀엽다. 내 인생에서 내가 나답다는 생각이 지금보다 더 진하게 든 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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