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백팔배를 올립니다 / 최상호

샌. 2013. 6. 7. 09:41

제 일 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생각하며 절합니다.

 

이 세상 처음 올 땐

인연 따라 온 것일뿐

 

산 속이든 물 속이든

돌고 도는 순리인즉

 

한 목숨

누리며 살 때

멈출 자리 봐 둘 일

 

 

제 사 배, 나의 진정한 얼은 어디에 있나 생각하며 절합니다.

 

하늘 뜻 새기는 일

먼 산보며 깨닫는다

 

땅의 뜻 다지는 일

길 가면서 되새긴다

 

늘 깨어

바라보는 일

쉬지 않는 이유다

 

 

제 십오 배, 하나의 사랑이 우주 전체에 흐르고 있음을 생각하며 절합니다.

 

달빛을 사랑한 별이 작은 눈을 끔벅이면

한 줄기 바람결이 풍경을 깨우도다

부처도 그윽한 웃음으로

달빛 별빛 모으신다

 

누구라 해탈한 듯 산속 절집 찾아오고

노스님 죽비 후려 새벽 군불 지피는데

선잠 깬 동자승 혼자

뒤척이며 찾는 엄마

 

 

제 십구 배, 생명의 샘물과 우주 뭇 생명의 기운이 내 안에 살아있으니 절합니다.

 

내 마음 가 닿은 곳

꽃이 피고 새가 운다

 

내 손길 가 머문 곳

열매 맺고 뿌리 벋고

 

내 목숨

끝자락에서

꿈 씨앗이 맺힌다

 

 

제 삼십이 배,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절합니다.

 

엎드려 절 받기도 그쯤이면 멈춰야지

한 시절 누렸으면 이쯤에선 내려야지

나무도

가을이 되면

겉 옷 따윈 벗더라

 

 

제 오십 배, 행복, 불행, 탐욕이 내 마음속에 있음을 알려고 절합니다.

 

부뚜막의 소금은 그저 하얀 알갱이일 뿐

내 몸이 겪어야만 길흉화복 되는 것을

앞다퉈

마음 쓸 일이

무에 그리 급하랴

 

오는 걸음 막지 않고 가는 옷깃 잡지 말며

웃음에는 웃음주고 눈물이면 닦아주며

하루치

땀냄새로만

내 업장 닦을 일

 

 

제 오십오 배, 인내는 자신을 평화롭게 하는 것임을 알아 절합니다.

 

중불로 끓여가는 곰탕 국물 허연 빛깔

시래기 익어가는 육개장 씹는 맛도

참는 게 이기는 거라고

반나절을 끓었다

 

내뱉지 못한 말이 부글부글 기어올라

걷어낸 웅얼거림 열이 식어 붉어질 때

그때 사 휘파람으로

시원하다 뱉으리

 

 

제 육십오 배,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모시려 절합니다.

 

한두 끼 주린 배는 냉수로도 채운다만

가난을 업으로 지고 평생을 견디어 가면

하늘이 노랗다 못해

땅도 꿈틀 일어선다

 

제몫의 뼈를 깎고 모서리를 맞춰가는

일용직 땀방울이 부익부를 일구어도

사리는 뻣속에 스며

미소 한 줌 지니리

 

 

제 팔십이 배, 생명을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임을 알고 느끼며 절합니다.

 

얼마나 숨 죽였으면

얼마나 그리웠으면

 

젊음은 초록이었으되

늙음은 갈맷빛이라

 

민둥산

억새밭 위로

흘러가는 저 인파

 

 

제 백팔 배, 이 모든 것을 품고 하나의 우주인 귀하고 귀한 생명인 나를 위해 절합니다.

 

나 있음에 네가 있고

너와 같이 이만큼 왔다

 

저 하늘은 오늘토록

나와 나를 감쌌으니

 

환생의 그날을 위해

맑게 혼백을 씻으리

 

- 최상호 시조집 <백팔배를 올립니다> 중에서

 

 

친척 형이 새로 나온 시조집을 보내주었다. 형이 펴낸 다섯 번째 시조집이다. 제목이 <백팔배를 올립니다>인데, 하나의 주제 아래 제 일 배부터 백팔 배까지 백여덟 편의 연작 시조가 실려 있다. 시를 빚어내는 형의 역량이 일취월장하는 듯하여 반가웠다.

 

형은 중학교 1년 선배다. 머리 모양 때문에 안 보는 데서는 짱구형이라 불렀는데 그때도 글을 잘 쓰더니 종내는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벌써 다섯 번째 작품집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몇 해 전에 명퇴를 했는데, 후년으로 갈수록 작품 활동이 점점 왕성해지는 것 같다. 책을 일독하며 그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몇 편 골라 보았다. 성찰하고 돌아보는 마음가짐이 맑다. 동시에 애써 정진하는 형이 모습이 보인다. 멀리서나마 새 시집 발간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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