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순간의 꽃 / 고은

샌. 2013. 6. 21. 08:02

오늘도 누구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

 

봄비 촉촉 내리는 날

누가 오시나 한두 번 내다보았네

 

*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사진관 진열장

아이 못 낳는 아낙이

남의 아이 돌사진 눈웃음지며 들여다본다

 

*

 

부들 끝에 앉은 새끼 잠자리

온 세상이 삥 둘러섰네

 

*

 

이 세상이란

 

여기 나비 노니는데

저기 거미집 있네

 

*

 

어린 토끼 주둥이 봐

개꼬리 봐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니

 

*

 

위뜸 아래뜸 개가 짖는다

밤 손님의 성(姓)

김가인가 박가인가

 

*

 

내려갈 때 보았네

올가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한번 더 살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죽은 붕어의 뜬 눈

 

*

 

설날 늙은 거지

마을 한 바퀴 돌다

 

태평성대 별것이던가

 

*

 

방금 도끼에 쪼개어진 장작

속살에

싸락눈 뿌린다

 

서로 낯설다

 

*

 

고군산 선유도 낮은 수평선

해가 풍덩 진다

 

함부로 슬퍼하지 말아야겠다

 

*

 

저 어마어마한 회장님 댁

거지에게는 절망이고

도둑에게는 희망이다

 

*

 

모 심은 논 밤새도록

천 마리 떼 개구리 일하시네

 

*

 

낙숫물 소리

나도

거미도 한나절 말이 없다

 

*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모두 무죄입니다

 

*

 

소가 운다

송아지가 운다

 

그 오랜 사랑을 사람이 흉내낸다

 

*

 

갈보도 좋아하네

꽃 좀 봐

열네 살 선희도 좋아하네

꽃 좀 봐

 

- 고은 시집 <순간의 꽃>에서

 

 

<순간의 꽃>에는 제목도 없는 짧은 시편들이 실려 있다. 선시(禪詩) 같기도 하고,  하이쿠(排句)를 닮은 것도 같다. 순간의 느낌과 깨달음이 응결된 시다. 사물이나 현상이 시인 자신의 심성과 부딪쳐 반짝 하고 빛이 난다. 꽃과 꽃을 보는 눈 사이, 그 찰나의 직관이라는 뜻에서 '순간의 꽃'이라 이름 했다 한다.

 

시집에서 눈에 띄는 대로 몇 편을 골라 보았다. 시인 따라 마음이 맑아지고 따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