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감자를 깎는다 / 이오덕

샌. 2013. 7. 19. 09:15

3시에 일어나

불을 켜고

어제 못다 본 신문을 읽는데

석 줄도 안 나가서 꾸벅꾸벅

그렇다고 누우면 잠은 달아난다.

서너 줄 읽다가 눈 감고 잠깐 쉬고

다시 읽다가 꾸벅꾸벅.....

그렇다, 감자를 깎자.

이럴 때 나는 감자를 깎는다.

감자는 모조리 밤알만큼 한 것들

그것도 겨울 난 감자라 싹이 나고

시들시들 골아 버린 것을

무주 산꼭대기에 사는

강 선생이 갖다 준 댕댕이바구니에 담아 와서

왼손잽이 등산칼로 깎는다.

이 조무래기 감자는

그대로 찌면 아려서 먹기가 거북해

그래서 깎는 것이고, 깎는 재미로

깎는 맛으로 깎는 것이다.

왼손잽이 내 손은

야구나 정구를 하면

놀림바탕이 되었지만

감자 깎고 밭 매고 풀 베는 데는

아무도 흉보는 사람이 없었지.

감자를 깎으면

생각나는 것이 또 많다.

무엇보다도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누님 생각이 난다.

누님은 아침마다 밥을 하면서

쌀을 씻으면서

감자 깎는 일만은 언제나 나한테

시켰지. "덕아, 빨리 감자 깎어!"

그래서 그때부터 내 손에는

고무공보다 감자알이 더 잘 돌아가고

더 잘 잡혔다.

감자를 깎으면 정말 생각나는 것이 많지.

소죽 끓인 아궁이불에는 언제나 감자를 묻어 놓고

나 혼자만 먹었구나. 지금 생각하니

누님과 자주 싸운 까닭이 구운 감자를 나 혼자만 먹어서

그랬던 것이구나 깨달아진다.

70년이나 지난 뒤에야 그것을 깨닫다니!

그 누님을 저세상으로 보내고서야 깨닫다니!

그 누님은 얼마 전만 해도

고향 마을 산비탈에 능금나무 심어서

농약도 안 쳐서 굵지도 않고 꺼뭇꺼뭇 보기 흉한

벌레 먹은 사과를 한 상자씩 해마다 보내 주셨지.

그 과수원에 난 고들빼기 알뜰히 캐서 담근 김치도

자주 보내 주셨지.

감자를 깎으면 또 권정생 선생 생각

<감자떡>이란 시

감자같이 울퉁불퉁한 산골 아이들 얘기를 쓴 동화

권 선생의 문학은 감자를 먹고 사는 사람들 문학이란 생각.

감자를 깎으면 꼭 또 생각나는 그림이 있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감자 깎는 어머니>

지금 내 앞에는

밀레가 그린 <저녁 종소리>가 벽에 걸려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쳐다보는 이 그림은

볼 때마다 내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샘물인데

두 부부가 서 있는 발밑에는

방금 캐 담은 탐스런 감자알들이 바구니에 담겨 있구나.

밀레는 농민의 아들이라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만

고흐는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그렇다, 그 누가 한 말대로 정말 고흐는 밀레의 아들이었지.

그리고 우리들 감자 먹고 사는 사람들은 그 얼굴빛이

누런빛이든 검은빛이든 모두가

밀레와 고흐의 아들이요 딸이요 손자들 아니고 무엇인가?

감자를 깎으면 또 소죽솥에 넣어준 그 감자 껍질을 먹고

힘을 내어 밭을 갈고 짐을 싣던 소들이 생각난다.

그 소들은 모두 죽어서 어떻게 되었는가?

다시 흙이 되고 나무가 되고 풀이 되고 물이 되고

나와 너가 되어 이 땅에

이 우주에 가득 차 있겠지.

감자를 깎으면 온갖 생각이

마치 감자 껍질처럼 줄줄이

이어져서 즐겁다.

감자 깎는 맛이

감자 먹는 맛보다 더 낫다.

먹는 맛보다.

 

- 감자를 깎는다 / 이오덕

 

 

글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글 따로 삶 따로인 경우가 더 많다. 어쩌면 이름난 사람일수록 더하다. 글만 읽고 사람은 보지 말자고 하지만 글의 느낌이 바래는 건 어쩔 수 없다. 머리에서만 짜낸 글은 깊은 감동을 주기 어렵다.

 

이오덕 선생은 글이 곧 그대로 삶이신 분이셨다. 평생 바른 글쓰기 운동을 펼치신 선생은 삶과 유리된 말장난에 불과한 글을 경계하셨다. 어느 강연에서는 이 세상에서 시인이 제일 나쁘다고 하셨다. 글을 비틀고 쥐어짜고 어렵고 모호하게 만들어 바른 생각을 표현하여 삶을 가꾸는 데 이바지하는 일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선생의 시를 읽으면 선생의 알뜰하고 소박한 삶의 모습이 그대로 전해진다. 가난하지만 감사하고 겸손하며 욕심 없는 삶, 감자를 깎는 선생의 맑은 마음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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