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자벌레 / 반칠환

샌. 2013. 7. 26. 10:43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 아무도 저이로부터 뚜렷한 수치를 얻어 안심하고 말뚝을 꽝꽝 박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경지정리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도 한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저이가 지나가면 나무뿌리는 제가 닿지 못하는 꽃망울까지의 거리를 알게 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 냈다고 한다 저이는 너와 그가 닿지 못하는 거리를 재려 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저이가 재고 간 것은 제가 이륙할 열 뼘 생애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엔 몇 개의 눈금이 주름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또 재어 거리를 지울 것이었다고 전한다

 

키요롯 키요롯 - 느닷없이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이제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울대를 박차고 나가 앞산에 가 닿는 메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이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 한다

 

- 자벌레 / 반칠환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유치원에 다닐 나이였다. 처음에는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가 열중하고 있었던 건 개미를 죽이는 일이었다. 한 손에는 까만 개미의 사체가 주근깨처럼 박혀 있었다. 그것도 모른 채 개미는 쉼 없이 구멍에서 나와 제 갈 길을 갔다.

 

내 어렸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던 시절, 주변에서 만나는 숨탄것들이 그 역할을 했다. 날개를 찢고, 꼬리를 자르고, 목을 비틀고, 온갖 잔인한 짓을 했다. 장난으로 잡고 죽였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인간 아닌 어떤 종도 장난이나 재미로 다른 생명을 죽이지는 않는다.

 

우리가 미물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하찮은 건 아니다. 시인은 자벌레를 통해 온 생명의 거룩함을 말하고 있다. 그들과 우리는 큰 생명의 다른 지체일 뿐이다. 그들이 아프면 내 몸이 아픈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이 세상의 종말 전에 찾아올지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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