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예천 태평추 / 안도현

샌. 2013. 8. 4. 12:13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이 있었다

 

객지를 떠돌면서 나는 태평추를 잊지 않았으나 때로 식당에서 메밀묵무침 같은 게 나오면 머리로 떠올려보기는 했으나 삼십 년이 넘도록 입에 대보지 못하였다

 

태평추는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와 김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인데 눈 많이 오는 추운 날 점심 때쯤 먹으면 더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입가에 묻은 김가루를 혀끝으로 떼어먹으며 한번도 가보지 않은 바다며 갯내를 혼자 상상해본 것도 그 수더분하고 매끄러운 음식을 먹을 때였다

 

저 쌀쌀맞던 80년대에, 눈이 내리면, 저 눈발은 누구를 묶으려고 땅에 저리 오랏줄을 내리는가? 하고 붉은 적의의 눈으로 겨울을 보내던 때에, 나는 태평추가 혹시 귀한 궁중음식이라는 탕평채가 변해서 생겨난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허나 세상은 줄곧 탕탕평평蕩蕩平平하지 않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탕평해야 태평인 것인데, 세상은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기울기 일쑤였고 그리하여 탕평채도 태평추도 먹어보지 못하고 나는 젊은 날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술집을 찾아 예천 어느 골목을 삼경三更에 쏘다니다가 태평추, 라는 세 글자가 적힌 식당의 유리문을 보고 와락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던 것인데, 그 앞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다가 대신에 때마침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말았던 것인데,

 

그날 밤 하느님이 고맙게도 채 썰어서 내려보내주시는 굵은 눈발을 툭툭 잘라 태평추나 한 그릇 먹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간절하게 참 철없이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 예천 태평추 / 안도현

 

 

내 고향도 시인 외갓집과 같은 지역권이어선지 묵을 자주 해 먹었다. 지금도 묵집이 많다. 시인과 달리 나는 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별 맛도 없으면서 미끄러운 느낌이 싫었는데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묵을 데운 다음 칼로 썰고 그 위에 묵은지와 김을 얹어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더 간단하게는 그냥 양념 장물과 섞어 먹었다. 간이 태평추 쯤 되는 음식이었다. 할머니들이 모여서 노실 때 잘 드셨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 음식맛은 뇌리에 각인되는 것 같다. 시인이 태평추를 그리워하는 건 이제는 사라진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시에 태평추라는 특이한 이름에서 태평한 세상에 대한 갈망도 읽는다. 시인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활동했고, 선거 운동 기간 중 쓴 글에 관계되어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그 뒤 시인은 절필을 선언했고, 최근에는 문인 217명이 '절필 선언이 강요되는 시대, 우리는 함께 싸운다'라는 지지 성명을 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음식 이름에도 '태평'이 들어갔는지, 그런 간절함으로 인해 세상은 이만큼의 꼴이라도 갖추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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