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산등성이 / 고영민

샌. 2013. 8. 9. 14:26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 됐든 한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大小事가 있을 때 차려입던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나가는 칠흙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마을의 한밤, 아버지는 이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다며 갈 데까지 아주 멀리 가보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 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아버지의 뒷모습, 잰걸음을 따라 나도 가만히 걷는다. 기세가 천 리를 갈 듯하다. 드디어 산등성, 고요하게 잠든 숲의 정적과 뒤척이는 새들의 혼곤한 잠속, 순간 아버지가 걷던 걸음을 멈추더니 집 쪽을 향해 소리를 치신다. 에이, 이 못된 할망구냐, 서방이 나간다면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이 못된 할망구, 평생을 뜯어먹어도 시원찮을 이 할망구, 뒤돌아 식식거리며 아버지 집으로 천릿길을 내닫는다. 지그시 웃음을 물고 나는 아버지를 몰고 온다. 어머니가 켜놓은 대문 앞 전등불이 환하다. 아버지는 왜, 팔십 평생 저 낮은 산등성이 하나를 채 넘지 못할까.

 

- 산등성이 / 고영민

 

 

나는 살면서 몇 개의 산등성이를 넘었을까? 넘은 것보다는 못 넘은 게 더 많다. 등성이까지 올랐다가 되돌아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중에서 큰 등성이 몇 개는 기억이 또렷하다. 만약 그 등성이를 넘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다른 강을 건너고 다른 숲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걸어가 보지 못한 길이어서 아쉬움을 느낄 뿐, 지금이 내가 선택한 최선의 삶이라는 건 의심하지 않는다. 등성이를 넘은 삶 역시 넘기 전의 삶을 그리워할 것이다. 물리에서 주기운동을 설명할 때 복원력이 나온다. 중심에서 벗어나면 원래 위치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다. 인생은 마치 복원력에 의한 끝없는 주기운동 같다는 느낌도 든다. 등성이에 올랐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정겹다. 어머니가 켜놓은 대문 앞 전등불이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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