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샌. 2013. 8. 16. 11:50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은퇴를 앞둔 친구는 낯선 얼굴로 '죽기 전에 해야 할 열 가지', 버킷 리스트를 얘기한다. 그러나 어차피 죽어야 할 존재라면 기어코 해야 할 버킷 리스트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본다. 죽음을 전제하면서 설마 저의 불멸을 믿는 건 아니겠지. 시집간 딸이 어린 새끼를 데리고 와 어미 앞에서 흐느껴 운다. 제 어미가 그러했듯이. 비가 새는 늙은 존재들이 다시 사랑을 꿈꾼다. 십오 초의 오르가슴 동안에는 고통을 잊을 것이다. 사람들은 '슬픔이 없는 십오 초'의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아침을 맞는다. 참 기묘한 세상이다. 슬픔 없는 십오 초는 우리가 슬픔의 존재임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닐까? 태양이 눈을 가린 그늘을 찾아 그저 조용히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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