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난설헌

샌. 2013. 10. 25. 14:16

너무 영민하고 너무 감성적이어서 시대와 불화했던 여인 허초희(許楚姬, 1563~1589), 스스로 지은 난설헌(蘭雪軒)이라는 호 그대로 그녀는 눈 속에 핀 한 송이 난초였다. 부모와 형제의 사랑을 받으며 자유로운 가풍에서 성장한 그녀는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웠고, 여덟 살 때 '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일찍이 천재성을 보였다. 그러나 열다섯 살 때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혼인하면서 시어머니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로 삶이 삐걱댔다. 더구나 제 손으로 키워보지도 못한 어린 두 자식을 일찍 여의고 나서는 생의 의욕마저 상실했다. 문학에의 열정도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고,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불행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난설헌>은 최문희 작가가 쓴 허난설헌의 일대기로 혼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난설헌의 일생을 섬세하고 애련하게 잘 그렸다. "나에게는 세 가지 한(恨)이 있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김성립이라는 남편의 아내가 된 것이다." 난설헌은 뛰어난 시재를 가진 재원이었지만 가부장적인 시대의 질곡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소설에 그려진 남편 김성립이나 시어머니 송씨가 유별나게 난설헌을 박대한 건 아니었다. 전형적인 조선의 남편과 시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난설헌 같은 자유로운 영혼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굴레였을 것이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얼마나 많은 난설헌이 있었을 것인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지만 규방에 갇혀 인고의 세월을 살다간 여인들을 떠올린다. 동생 허균이 시집을 출간해주지 않았다면 난설헌도 잊혀진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신분상의 차별로 한 많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이 있었다. 그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이 숨 막히는 감옥이 된다. 그래서 죽더라도 한 번 발악이라도 해보는 힘찬 이들도 나타나는 법이다.

 

소설에서 난설헌은 조용하고 소극적인 여인으로 그려진다. 부당한 대우에 대해 항의 한 번 하는 일이 없다.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느 여인네처럼 내면으로 삭여낼 뿐이었다. 그러나 두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오빠를 잃고, 친정집이 기울어가는 걸 보며 지상에 대한 미련을 버렸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남편과의 소통의 부재로 인한 반작용으로 대신 최순치를 그리워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 속 허구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었다. 난설헌은 현실에 대한 적응과 투쟁보다는 도피 쪽을 택했다. 그녀가 지은 시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작가는 난설헌을 아름다움의 표상이었다고 하면서 '정갈하게 다듬어진 외모와 빛의 알갱이처럼 영롱한 영혼의 소유자,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순수, 원망이나 미움, 화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당겨, 시라는 문자를 통해 여과시켰던 이'라고 썼다. 소설을 읽고나니 난설헌에 대한 이미지가 분명하게 그려진다.

 

난설헌의 시 한 편을 읽는다. 소설에서는 이 시의 배경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균이 생원으로 급제했다는 희소식과 함께 그미의 가슴에 메울 수 없는 구멍으로 자리한 비보가 날아든다. 금강산 대명암에서 수양하던 오라버니가 병을 얻어 의원을 찾아가던 도중, 금화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이었다. 균이 허봉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달려갔고, 그미는 건천동 친정으로 갔다. 불도 안 켠 컴컴한 한밤을 모녀가 마주 앉아 지새웠다. 그미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직이 시구를 읊조렸다.

 

고가라서 낮이건만 인적도 없고

뽕나무 위에서 부엉이만 우네

까칠한 바위 옥 층계에 돋고

참새가 빈 다락에 깃을 쳤다네

전에는 말과 수레 머물더니만

지금은 여우의 소굴이 되어

달관한 분의 말씀을 이제 알겠소

부귀는 나의 몫이 아니란 것을

 

어머니 김씨가 딸의 야윈 어깨을 얼싸안았다. "초희야. 너무 영민함도, 너무 다정함도, 지나친 나약함도 이 세상에 배겨나지 못하는 것을, 어쩌자고 머릿속에 촛불을 켜고 산다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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