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내가 가장 착해질 때 / 서정홍

샌. 2014. 1. 22. 16:11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 내가 가장 착해질 때 / 서정홍

 

 

내가 이 꼴로 살아도 되는 걸까? 인간이 살아가는 가치와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닮아야 할 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 시를 접하니 농부의 마음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이 아닌가 싶어진다. 자본주의 시대지만 그래도 아직은 착하고 순수한 농심(農心)이 어딘가에는 살아있을 것만 같다.

 

이 시는 같은 이름의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에 실려 있다. 시집에는 이런 시도 있다.

 

 

혼인하고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 집에 도둑님 다녀가셨다. 가난한 살림살이 가져갈 것이 없었던지 장롱 옷장 서랍장 가리지 않고 온통 뒤적거려, 방 안 가득 옷가지들이 수북이 쌓였다. 큰아들 녀석 학비 보내고 몇 천 원 남은 경남은행 통장과 생활비 몇 만 원 남은 농협 통장은 그대로 있다. 무엇을 가져갔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던 아내가 지난해부터 아껴 두었던 상품권 두 장이 없어졌다고 한다. 한 장은 지난해 처남이 준 것이고, 한 장은 후배가 준 것이다. 할인 기간에 발 편한 구두 한 켤레 살 거라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내였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틈이 날 때마다, 구두는 두세 켤레 있는 것이 좋다고 했고, 자주 바꿔 신어야 냄새도 안 나고, 더 오래 신을 수 있다고 했는데 아내는 내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끼면 똥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막내아들 녀석은 소리 내어 웃었다. "어머니, 상품권이 우리 집에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도둑한테 얼마나 미안했겠어요. 목숨 걸고 들어왔는데." 큰아들 녀석은 따라서 능청스럽게 한 마디 거든다. "어머니, 그 도둑이 우리 집에서 훔친 상품권으로 새 구도 사 신고, 다음부터는 부잣집 털지 않겠어요?"

 

듣고도 못 들은 척, 아내는 어질러진 옷가지를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도둑놈 덕분에 미뤘던 옷장 정리 잘 하게 되었네. 그래도 그렇지, 어디 털 데가 없어..... 그래, 얼마나 살기 딱했으면 우리 집을 털었겠노."

 

창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도둑과 한패가 되어 가고 있었다.

 

- 창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 서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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