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거꾸로 가자 / 윤재철

샌. 2014. 3. 20. 11:31

짧게 가자

빠르게 가자

무의미하게 가자

그녀는 잊기 위해 드라마로 간다

 

그녀는 알레고리에 익숙하다

판타지에 익숙하다

리얼리즘은 천박해

부담스러워

 

상징적으로 가자

모자 쓰고 가자

가리마도 가리고

바로 클라이맥스로 간다

 

한일강제합병은 모른다

진주가 어디 붙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온갖 암호와 예측에 충분히 익숙하다

 

나는 거꾸로 가자

예측 불가능하게 가자

벌거벗은 몸뚱이로 가자

저 강변 항하사 같은 금모래밭

남풍에 반짝이며 팔랑이는 미루나무 이파리

그 오르가슴을 나는 잊지 못한다

 

- 거꾸로 가자 / 윤재철

 

 

세상 사람들과는 거꾸로 살아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듯하다. 오히려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아니오, 라고 답하라. 계단을 내려가면 올라가라. 1등을 다툴 때 꼴찌에 서라. 쉬운 길보다는 어려운 길을 택하라. 잘 나고 똑똑한 사람에 환호할 때, 바보 예찬의 노래를 불러라.

 

내 안에도 삐딱이 기질이 있다. 비주류 본능이다. 가끔 버마재비 몸짓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소리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주류의 사고를 외면하고 거꾸로 사는 건 외로움을 친구삼아야 한다. 반면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자족의 행복이 선물로 주어진다. 세속의 즐거움과는 비할 수 없는 오르가슴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은 아름다웠던 유년의 한 때를 회상시킨다. 시인이 '거꾸로 가자'라고 하는 건,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들린다. 어른이 된 우리는 너무 영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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