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이상의 연애편지

샌. 2014. 8. 1. 09:33

얼마 전에 이상(李箱)의 연애편지가 발굴되어 공개되었다. 1935년에 쓴 이 편지는 25살 된 이상이 소설가 최정희를 연모해서 보낸 글이다. 최정희는 백석으로부터도 사랑의 고백을 들었다고 하니 당대의 문학마당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천재시인이라 불리고 난해한 시로 유명한 이상이지만 연애편지는 뭇 연인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아쉬움이 애틋하게 적혀 있다. 청년 시절 이상의 한 단면을 엿보게 되어 흥미롭다.

 

뒷날 최정희는 시인 김동환과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는데, 그중 소설가 김지원과 김채원은 이상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

 

 

지금 편지를 받았으나 어쩐지 당신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슬픕니다. 당신이 내게 이러한 것을 경험케 하기 벌써 두 번째입니다. 그 한 번이 내 시골 있던 때입니다.
이런 말 하면 웃을지 모르나 그간 당신은 내게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 나는 다시금 잘 알 수가 없어지고 이젠 당신이 이상하게 미워지려고까지 합니다.
혹 나는 당신 앞에 지나친 신경질이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점점 당신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느날 나는 확실히 알았었고..... 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걸음이 말할 수 없이 허전하고 외로웠습니다. 그야말로 모연한 시욋길을 혼자 걸으면서 나는 별 이유도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죽을 뻔했습니다..
집에 오는 길로 나는 당신에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어린애 같은, 당신이 보면 웃을 편지입니다.

"정희야, 나는 네 앞에서 결코 현명한 벗은 못됐었다. 그러나 우리는 즐거웠었다. 내 이제 너와 더불어 즐거웠던 순간을 무덤 속에 가도 잊을 순 없다. 하지만 너는 나처럼 어리석진 않았다. 물론 이러한 너를 나는 나무라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제 네가 따르려는 것 앞에서 네가 복되고 밝기 거울 같기를 빌지도 모른다.
정희야, 나는 이제 너를 떠나는 슬픔을, 너를 잊을 수 없어 얼마든지 참으려구 한다. 하지만 정희야, 이건 언제라도 좋다. 네가 백발일 때도 좋고 내일이래도 좋다. 만일 네 '마음'이 흐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아니라 네 별보다도 더 또렷하고 하늘보다도 더 높은 네 아름다운 마음이 행여 날 찾거든 혹시 그러한 날이 오거든 너는 부디 내게로 와 다고-. 나는 진정 네가 좋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네 작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따구니도 좋다. 나는 이후 남은 세월을 정희야 너를 위해 네가 다시 오기 위해 저 야공(夜空)의 별을 바라보듯 잠잠히 살아가련다......."

하는 어리석은 수작이었으나 나는 이것을 당신께 보내지 않았습니다. 당신 앞엔 나보다도 기가 차게 현명한 벗이 허다히 있을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나도 당신처럼 약아보려구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 고향은 역시 어리석었던지 내가 글을 쓰겠다면 무척 좋아하던 당신이- 우리 글을 쓰고 서로 즐기고 언제까지나 떠나지 말자고 어린애처럼 속삭이던 기억이 내 마음을 오래도록 언짢게 하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나는 당신을 위해- 아니 당신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구 해서 쓰기로 한 셈이니까요-.

당신이 날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만나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맘도 무한 흩어져 당신 있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습니다.
금년 마지막 날 오후 다섯 시에 후루사토[故鄕]라는 집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회답주시기 바랍니다.

李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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