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철수와 영희 / 윤제림

샌. 2014. 9. 20. 07:32

철수와 영희가 손 붙잡고 간다

철수는 회색 모자를 썼고, 영희는 빨간 조끼를 입었다

바둑이는 보이지 않는다

분수대 앞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있는

창식이 앞을 지날 때

영희가 철수의 팔짱을 낀다

창식이는 철수가 부럽다

 

철수와 영희가 벤치에 앉아

가져온 김밥을 먹는다

철수가 자꾸 흘리니까 영희가 엄마처럼

철수의 입에 김밥을 넣어준다

공원 매점 파라솔 그늘 아래 우유를 마시던

숙자가 철수와 영희를 바라본다

숙자는 영희가 부럽다

 

일흔두엇쯤 됐을까

철수와 영희는 동갑내기일 것 같고

창식은 좀 아래로 보인다

물론, 철수와 영희는 부부다

 

- 철수와 영희 / 윤제림

 

 

세월은 모든 것을 낡고 시들게 한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나 철수와 영희로 되어 간다. 부럽게 바라보는 창식이와 숙자도 있다. 늙으면 다 어린이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이름에 담겨있는 것 같다. 이 시에서 주목한 건 일흔두엇쯤 됐다는 나이다. 일흔두엇이라면 나한테는 십 년밖에 안 남았다. 철수는 얼마 뒤의 내 모습일 수도 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지나고 보면 한순간에 불과하다. 왠지 인생을 다 산 것 같다. 그러나 십 년 뒤가 아니라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즐겁게 사는 도리밖에 없다.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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