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람들끼리만 / 백무산

샌. 2014. 9. 26. 12:04

할머니께서 밭에 콩을 심으실 때

한 구멍에 세 알씩 심어

날짐승 들짐승 몫도 챙기셨다고요?

그래요, 그건 이야기 시절의 이야기지요

 

할머니 가신 뒤의 배곯은

산꿩이 내려와 세 알 다 쪼아먹고

멧돼지가 와서 밭을 통째 뒤집

메뚜기가 떼로 덤비고 까치가 떼로 날고

깔따구와 여치가 떼로 습격하고

 

사람들이 떼를 지어 한 일과

사람들이 싹쓸이로 한 일을

저들은 거꾸로 그렇게 합니다

 

할머니 이야기엔 그들도 함께 둘러앉을 자리가 있었습니다

두꺼비도 까치도 온갖 미물들도 둘러앉고

산신도 용왕도 집안의 업의 눈치도 살피고

짐승들이 들을까 알곡들이 삐칠까

나무가 속상해할까 소곤소곤 입조심 하느라

이야기 속에 그들 자리가 있었습니다

 

할머니 가신 뒤로 세상의 이야기는

사람끼리만 사람의 말로만 떠들고 있습니다

세상은 많은 이야기들을 나날이 만들고

나날이 많은 이야기의 길을 내고 있지만

말이 모자라고 소통이 모자란다 합니다

 

할머니 가신 뒤에

빙 둘러앉았던 자리 여기저기 숭숭 빠져

이야기가 빙 돌아오다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 사람들끼리만 / 백무산

 

 

시골에 가보면 곡식을 두고 싸우는 농민과 짐승의 대결이 거의 전쟁 수준이다. 고향 어머니도 고구마 짓기는 아예 포기하셨다. 뒷산 멧돼지를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험해진 탓일까, 짐승들도 전처럼 얌전하지 않다. 어렸을 때는 가을 논에 찾아오는 새떼를 쫓기 위해 허수아비도 세우고 피댓줄 같은 줄을 흔들며 부딪쳐서 딱 소리를 냈다. 그러면 우루루 도망갔다가 한참 동안 오지 않았다. 이젠 허수아비를 무서워하는 새도 없고 피댓줄 소리로는 어림도 없다. 대포 소리를 틀어야 겨우 반응할 정도다. 날짐승도 들짐승도 그만큼 영악해졌다는 얘기다. 짐승이나 자연과의 교감이 사라진 결과다. 말은 엄청나게 많아졌지만 웬일인지 사람들끼리도 대화와 소통이 안 된다 한다. 우리끼리 아무리 잘 산들 소용없다. 현대인의 자연 불감증을 치유하지 않는 한, 사람 사이의 소통 단절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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