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낭비 사회를 넘어서

샌. 2015. 2. 8. 10:57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계획적 진부화'를 다룬 소책자다.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인 프랑스 철학자 세르쥬 라투슈(Serge Latouche)가 썼다. 부제가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다.

 

경제학에서 진부화란 대체로 기술적 진부화를 가리키는 말로 기술 발전에 의해 기계, 설비 등이 구식으로 전락하여 가치가 하락하는 것이다. 기술적 진부화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런데 인간이 고의로 조작하는 진부화가 있다. 하나는 심리적 진부화로 주로 광고를 통해 제품을 빠른 시간에 낙후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행의 변화나 사람 심리를 이용하여 휴대폰이나 자동차의 교체 주기를 빠르게 만든다.

 

두 번째가 이 책에서 다루는 계획적 진부화다.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공산품의 수명을 단축시켜 새로운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종류의 조작을 말한다. 시장에서 제품이 포화 상태가 되면 생산량이 유지되기 어렵다. 따라서 수요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건들은 빠른 속도로 버려지고 교체되어야 한다. 성장에 중독된 우리의 생산 시스템이 계획적 진부화의 출발점이 된다. 제품을 많이 팔아먹기 위해서는 오래 쓰는 물건이면 안 된다.

 

1881년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전구는 수명이 1500시간에 달했다. 1920년대에 생산된 전구의 평균 수명은 2,500시간이었다. 그보다 훨씬 오래가는 전구도 있었다. 그러나 제너럴 일렉트릭을 포함한 전구 제조업체들은 제네바에 모여 전구 수명을 결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거기서 전구의 수명을 1,000시간으로 제한하자는 목표가 정해졌고 1940년대에는 이런 전구들이 생산되었다. 옛 동독에서 생산되던 수명이 긴 전구는 서구 시장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애플 아이팟 배터리는 제조 단계에서부터 수명이 18개월로 제한되어 나왔다. 아예 수리도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 새 제품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15,000회만 사용하면 고장이 나도록 설계된 칩을 내장한 프린터도 있다. 사용하던 컴퓨터가 고장 나면 수리하는 것보다는 그 기회에 성능이 좋은 새 모델을 구입하려고 한다. 세트로 된 부품값이 비싸서 수리하는 것보다는 새 제품을 사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얼마 전에 TV가 고장 났다. 5년 정도 사용한 것인데 화면에 세로로 푸른색 선이 생기는 현상이 일어났다. 보는 데는 큰 지장이 없으나 신경이 거슬리는 일이었다. AS를 맡겼더니 기판 전체를 교체해야 한다면서 20만 원이 든다고 했다. 새 TV를 사는 가격의 1/3이니 차라리 버리고 새 물건을 사는 게 낫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요사이는 고쳐서 쓴다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 새 모델이 나오면 멀쩡한 휴대폰인데도 버린다. 2002년 통계로 미국에서는 작동 가능한 휴대전화기 1억 3,000만 대가 한 해에 폐기되었다. 진부화의 어두운 단면이다.

 

제한된 자원을 이용하는 지구에서 이런 시스템은 언제까지나 용납될 수 없다. 파멸을 앞당기는 행위란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기계의 진부화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진부화로 연결된다. 모든 것을 일시적이고 일회성으로 취급하는 문명은 비인간화의 길을 걷게 될 게 뻔하다. 전 지구적인 위기가 닥칠 때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국가 관리의 독재 체제의 등장은 막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최후에는 오염으로 황폐화된 세계 속에서 권능을 잃게 된 인간은 반은 생물이며 반은 컴퓨터인 슈퍼머신이 됨으로써만 생존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탈성장 혁명'이다. 성장을 위한 성장을 멈추고 검약과 절제의 옛 가치를 회복하는 것만이 인류와 지구를 살릴 수 있다. 인류에게 미래가 존재하기를 바란다면 그 길밖에 없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까지 급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 혁명의 핵심은 우리의 상상력을 탈식민화하는 데 있다.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다시금 세계에 마법의 주문을 걸어야 한다. 새로운 인류-우주론의 출현을 고대할 수밖에 없다.

 

<낭비 사회를 넘어서>는 1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정도의 작은 분량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었다. 지은이가 꿈꾸는  '검소한 풍요의 사회'는 성장보다는 균형, 돈보다는 사람이 우선이 되는 세상이다. 지금의 천민자본주의는 어떻게든 극복되어야 할 과제다. 이런 세상에서 대중들은 피해자면서 공범자다. 의식을 하든 못하든 고분고분한 소비자로서 악의 체제에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탈성장과 탈번영이 아니고서는 우리 삶뿐 아니라 지구의 미래도 보장할 수 없다. 대중 의식의 대오각성이 필요한 때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유의 발견  (0) 2015.02.21
생각의 탄생  (0) 2015.02.14
양자 세계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0) 2015.01.30
국제시장  (0) 2015.01.23
백석 평전  (0) 2015.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