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미황사 / 김태정

샌. 2015. 2. 16. 09:24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 불생불멸.... 불생불멸.... 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 미황사(美黃寺) / 김태정

 

 

김태정 시인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이라는 시집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참 좋은 시들이 많았다. 아끼면서 한 편 한 편 읽었다. 생면부지의 시인이지만 왠지 친근하고, 그러면서 가슴 아리게 시인의 슬픔이 전해져 왔다. 자발적 가난과 변두리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시인, 달마산 아래 미황사와 그 아랫마을로 들어가서 생의 마지막을 보낸 시인, 그러다가 암으로 오십도 마저 채우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난 시인, 시집에 나온 시인의 얼굴을 보며 마음 한 곳이 싸해졌다.

 

직장 동료들과 미황사에 갔던 게 2007년 봄이었다. 백련사 템플 스테이로 일박하고 미황사를 찾았다. 그 당시 시인은 미황사를 떠나 달마산 아래의 장춘 마을에 기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시인도 이 시집도 몰랐다. 알았더라면 미황사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다시 미황사를 찾아가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 미황사, 그 세심당 앞마당에서 시인의 시집을 열어보고 싶다. 순결했던 영혼을 만나보고 싶다.

 

 

목탁 소리 도량석을 도는 새벽녘이면

일찍 깬 꿈에 망연하였습니다

발목을 적시는 이슬아침엔

고무신 꿰고 황토 밟으며

부도밭 가는 길이 좋았지요

돌거북 소보록한 이끼에도 염주알처럼

찬 이슬 글썽글썽 맺혔더랬습니다

저물녘이면 응진전 돌담에 기대어

지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햇어둠 내린 섬들은

마치 종잇장 같고 그림자 같아

영판 믿을 수 없어 나는 문득 서러워졌는데

그런 밤이면 하릴없이 누워

천장에 붙은 무당벌레의 숫자를 세기도 하였습니다

서른여덟은 쓸쓸한 숫자

이미 상처를 알아버린 숫자

그러나 무당벌레들은 태앗적처럼

담담히 또 고요하였습니다

어쩌다 밤오줌 마려우면

천진불 주무시는 대웅전 앞마당을

맨발인 듯 사뿐, 지나곤 하였습니다

달빛만 골라 딛는 흰 고무신이 유난히도 눈부셨지요

달빛은 내 늑골 깊이 감춘 슬픔을

갈피갈피 들춰보고, 그럴 때마다 나는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오줌을 누었습니다

눈앞에 해우소를 두고서 부끄럼성 없이

부처님께 삼배를 드릴 때처럼 다소곳이

무릎을 구부리고 마음을 내릴 때

흙은 선잠 깬 아이처럼 잠시 칭얼거릴 뿐,

세상은 다시 달빛 속에 고요로워 한시절

동백나무 그늘 속에 깃들고 싶었습니다

영영 나가지 말았으면 싶었습니다

 

-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 김태정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 동백꽃 피는 해우소 / 김태정

 

 

어느 표류하는 영혼이

내생을 꿈꾸는 자궁을 찾아들듯

떠도는 마음이 찾아든 곳은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

 

장춘이라는 지명이 그닥 낯설지 않은 것은

간장 된장이 우리 살아온 내력처럼 익어가는

윤씨 할머니댁 푸근한 뒤란 때문이리라

 

여덟 남매의 탯줄을 잘랐다는 방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모처럼 나는

피곤한 몸을 부린다

할머니와 밥상을 마주하는 저녁은 길고 따뜻해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개밥바라기별이 떴으니

누렁개도 밥 한술 줘야지 뒤란을 돈다

맑은 간장빛 같은 어둠에

나는 가만가만 장독소래기를 덮는다

느리고 나지막한 할머니의

말맛을 닮은 간장 된장들은 밤 사이

또 그만큼 맛이 익어가겠지

 

여덟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

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에서

태아처럼

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웅크려 앉아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아

차랍차랍 누렁이 밥 먹는 소릴 듣는

 

해남하고도 송지면 달마산 아래

늙고 헐거워져 편안한 윤씨댁 뒤란은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오늘밤이 오늘밤 같지 않고

어제가 어제 같지 않고

내일이 내일 같지 않고 다만

 

개밥바라기별이 뜨고

간장 된장이 익어가고

누렁이 밥 먹는 소리

천지에 꽉 들어차고

 

- 달마의 뒤란 / 김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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