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슬픔을 권함

샌. 2015. 4. 6. 08:36

슬픔을 권하다니,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다. 삶이 스산할수록 양지를 찾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걸 나무라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은이는 어설픈 기쁨과 희망보다는 차라리 슬픔과 절망이 고단한 삶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시대가 잔인한 이유는 슬프고 절망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이리라. 늘 밝은 의지와 의욕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을 강요하는 시대의 야만을 얼마나 더 견뎌내야 할까.

 

그렇다. 외로움과 슬픔은 인간 삶의 한 부분이다. 값싼 희망과 위로를 파는 약장사들은 슬픔을 외면한다. 슬픔에서 회피하는 방법을 떠들어댄다. 그러나 사람은 슬플 때 가장 인간적이 된다. 제대로 슬퍼할 줄 모른다면 인생을 깊이 있게 사는 게 아니다. 남덕현 씨가 쓴 <슬픔을 권함>은 가난, 고독, 소외, 죽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지은이를 포함해 가난하고 병든 농민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고 어둡기만 한 책은 아니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에는 밟힐지언정 스러지지 않는 민중의 의지와 해학이 들어 있다.

 

그렇지만 지은이의 슬픔에는 가슴이 시리다. 난 지은이처럼 슬픔을 정면으로 지켜볼 자신이 없다. 마음이 명징하게 슬프지 않고서야 이런 글이 나올 수 없다. 그래도 지은이의 생각을 따라 오물거리다 보면 쓴맛도 단맛으로 변한다. 미리 뱉어내는 건 어린아이의 짓이다. 또한 슬픔이 아름다운 건 절제가 있기 때문이다. 슬픔에 징징댄다면 아름다울 수 없다. 책머리에 나오는 지은이의 말이 슬픔이 주는 의지를 말해준다.

 

"진화하지 않는 슬픔이란 밑도 끈도 없이 견디고 또 견디는 슬픔이다. 끝끝내 견디는 인간의 슬픔은 결코 진화하지 않는다. 그런 슬픔은 강하며, 그런 슬픔만이 세상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전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슬픔을 건너뛴 세상의 모든 의지는 죄다 헛꽃이다. 슬픔 속에서 모든 의지를 상실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의지가 생겨난다면 그 의지야말로 불굴의 의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체도 좋다. 짧고 박력이 있는 건 김훈 씨의 글과 비슷하다. 책의 첫 글을 옮긴다.

 

 

별빛이 압정처럼 눈동자에 박히는 밤

 

어머니 돌아가시고 딱 십 년 만에 네가 다시 아버지를 잃는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별다른 뜻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개미 한 마리 기어가는데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아장아장 개미를 짓이기고 엄마에게 걸어간다.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의 뜻이란 말이냐. 다만 처연할 따름이고, 그래서 내 마음이 처연하다.

 

아버지에 대한 사람들 이야기는 괘념치 마라. 죽은 사람 옆에 서 있는 산 생명들은 본시 다 사족 같은 것이다. 하물며 말일까.

 

사유가 날이 서면 설수록 타인에게 한없이 너그러웠던 네 아버지의 덕이요 유산이라고 여기기 바란다. 꽃이 피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매번 질 수 있는지, 그 꽃에서 무슨 향기가 나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네 아버지는 그걸 알았다.

 

나는 그런 네 아버지가 참 좋았고, 깊이 존경하며 따랐다. 그런 나를 네 아버지는 당신이 평생 농사지어야 할 슬픔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그뿐이고, 나머지는 도무지 쓸모없고 상관없는 일들이다.

 

지극한 사람을 잃으면 깊고 치명적인 내상을 입는다. 통증은 여기가 바닥이다 싶으면 언제나 한 층을 더 뚫고 내려가는 법이니, 통증의 집요함과 지구력에 놀라지 말거라. 그저 그러려니 했으면 좋겠다.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개 짖는 소리에 맞춰 신음 소리를 내며 앓게 된다. 내 보기엔 그게 어른이다.

 

냉장고 묵은 음식은 다 버렸고 구석구석 쓸고 닦았다. 쌀 새로 사다 놓았으니 그놈부터 헐어 먹어라. 먹던 쌀은 눅눅해서 베란다에 신문지 깔고 펼쳐 놓았다. 혹시 쌀벌레가 기어 다닌다고 공연히 죽이지 말거라. 때가 되면 쌀 밖으로 기어 나와 번데기가 되고 나방이 되어 날아간다. 사람이 슬픔을 날려 보내는 이치도 크게 다르기야 하겠느냐. 볕 좋은 날, 베란다에 나가 쌀 고르는 슬픔은 참 좋다. 시간이 훌쩍 갈 게다.

 

당부가 있다면 네 입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것, 네 몸으로 입었다 벗어 놓는 것, 네가 누웠다 일어나는 자리를 네 손으로 정갈하게 다루기 바란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나는 집을 깨끗이 쓸고 닦은 뒤 고요한 가운데 소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을 때 나의 존엄을 느낀다. 인생, 그게 절반이고 그럴 수만 있다면 나머지 절반도 허물없이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네 방 책상 위의 책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네 생각은 네가 정리하기 바란다.

 

외삼촌이 미국으로 가자면 못 이기는 척 가는 것이 좋겠다. 네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이기도 하다.

 

너에게 아무 약속도 못 하고 떠난다. 그러나 네가 어떤 의미로 나에게 들이닥칠 때, 오래된 의미인 듯 여길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어쩔 수 없는 내 한구석으로 여긴다.

 

별빛이 압정처럼 눈동자에 박히는 밤이다. 아버지도 너를 압정처럼 아프게 눈동자에 박고 나서야 눈을 감았을 게다.

 

그런 줄만 알고 살거라.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몫  (0) 2015.05.11
자발적 복종  (0) 2015.04.13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0) 2015.03.31
다윈의 식탁  (0) 2015.03.26
허균의 생각  (0) 2015.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