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샌. 2015. 6. 2. 11:12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봄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쉽게 씌어진 시 / 윤동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윤동주는 일본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청년이 제국의 수도 도쿄에서 공부해야 하는 심정이 어땠을까. 하숙집 좁은 방에서 남몰래 이 시를 썼을 시인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1942년의 이즈음의 계절이었다.

 

제목을 '쉽게 씌어진 시'라 붙인 것은 쉽게 사는 삶에 대한 경계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일신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동포들도 있는데 부모로부터 학비를 타 쓰는 일본 유학이 무척 부끄러웠을 것이다. 시인의 예민한 감성이 결코 공부에만 몰두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행동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그런 갈등과 화해가 마지막 연에 보인다.

 

이 시는 경성에 있던 친구 강처중이 시인에게서 받은 편지에 동봉되어 있었다. 친구는 비밀리에 간직하고 있다가 해방이 되고서야 공개했다. 조선어로 작품을 발표할 수도 없었던 그 시절, 6첩 다다미방에서 홀로 번민하며 쓴 이 시는 결코 쉽게 씌어진 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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