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펌] 청년 전쟁

샌. 2015. 8. 14. 17:34

이오덕 선생의 옛글 여느 구석엔 권정생 선생과 조우한 순간이 적혀 있다. ‘너무나도 훌륭한 젊은 동화작가를 발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결과적으로 권정생은 이오덕보다 몇 해를 더 살았다.

하지만 평생 온몸에 퍼진 결핵과 합병증으로 고생했다. 하루 30분도 앉아 일하기 어려운 날이 많았지만, 한결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누구보다 맑고 강렬하게 사유했다.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언젠가 그의 안동집에서 한담을 나누던 그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아까 뱀이 방에 들어왔어요.” “마당의 잡초를 그냥 두시니까 뱀이란 놈이 방 안과 밖을 구분 못한 모양이군요. 그런데 독사면 어쩌시려고요.” “독사는 방에 안 들어와요.” “그런가요.” 다녀와 그쪽 전문가에게 물었더니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 실소했다. 나는 그제서야 그의 말이 농담이었다는 사실과, 그 농담이 뭇 생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과 태도에 대한 조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식물을 모조리 잡초라 규정하고 없애버리는 인간의 태도란 생태의 관점에서 얼마나 가소로운가.

200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10억원이 넘는 돈이 남았다. 한국 아동문학에서 손꼽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는 인세 수입이 많았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헐어주곤 했음에도 거액이 남은 이유는 워낙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한 달 생활비에 대해서 5만원 설도 있고 10만원 설도 있다. 넉넉히 잡아도 20만원을 채 넘기진 않았을 것이다. 말년에 거동이 더욱 불편해진 그를 걱정한 지인이 소박하면서도 생활하기 편한 집을 한 채 지어준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불편하다’며 안동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불편은 세상이 지시하는 불편과는 다르거나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그는 늘 그런 불편들과 맞섰다.

그는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라 불리기도 한다. 그 말엔 사실 맹랑한 함의가 들어 있다. 권정생은 성자고 나는 인간이니 나는 절대로 권정생처럼 살진 않는다는 굳은 의지. 그럼에도 나는 그런 성자의 삶을 존경하고 따르려 노력하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노골적 과시. 권정생은 그런 이중의식 역시 조소하곤 했다. 노무현 정권이 이라크 전쟁에 파병하려 할 때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 반대 운동이 거셌다.

권정생은 ‘제국주의 전쟁 파병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넓은 아파트와 자동차를 갖는 게 삶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이상, 내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가 이라크에 날아가는 폭격기와 다를 게 뭔가.’

그를 성자라 찬미하는 사람들의 속내가 어떻든 그가 그렇게 불릴 만한 삶을 산 건 사실이다. 그런데 가정해 보자. 만일 그가 젊은 시절부터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고 서울에서 아등바등 애를 쓰다 결국 시골로 밀려났다면, 뱀이 방 안팎을 구분 못하는 남루한 오두막에서 한 달에 20만원도 못되는 돈으로 궁핍하게 살다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면 어땠을까.

세상에 그보다 초라하고 불쌍한 인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성자라 불리며 존경받는다. 그 엄청난 격차에 인간의 삶이 갖는 중요한 이치와 힘이 담겨 있다.

 

청년들이 제 나라를 ‘헬 조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 한국이 청년들에게만 지옥은 아니지만, 청년들에게 지옥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나라의 부를 대부분 점유한 부모 덕에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극소수 ‘귀족 청년’은 빼고 하는 이야기다.)

극우 언론들도 트집 잡지 않는 걸 보면 기성세대는 대체로 헬 조선이라는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다. 기성세대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청년들에게 훈계와 훈수를 늘어놓던 사람들이 비난받게 된 데 대한 학습효과도 있지만, 무엇보다 변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좌우를 막론하고 헬 조선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거나 기득권에 기생하고 있거나,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기성세대는 청년 현실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막되어 먹은 태도를 보이든 짐짓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든 다를 건 없다. 마찬가지로 기성세대를 ‘아프면 환자지 개XX야’라고 욕하든 ‘개념 아저씨’라 칭찬하든 달라지는 건 없다. 현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현실의 변화는 오로지 청년들 스스로 일어날 때, 헬 조선을 때려 부수려고 일어날 때 시작된다. 권정생은 그 지점에 의미 있는 교훈을 준다. 현재의 세상을 수용하며 그 안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 애쓰는 사람과, 다른 세상을 꿈꾸며 제 삶에서 꿈꾸는 세상의 편린들을 구현해내려 애쓰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의 힘을 갖는다는 교훈을.

현재 세상을 수용하는 한 현재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하소연과 아우성은 기껏해야 동정과 무마 시도로 돌아올 뿐이다. 비정규직의 피폐한 삶을 외치고 최저임금 1만원의 당위성을 외쳐도 체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천연덕스럽게 비정규직을 늘리고 최저임금 동결안을 내놓는다.

 

청년들이 현재 세상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을 때, ‘나는 다른 세상을 원한다’고 선언하며 싸움을 시작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체제의 지배자들 얼굴에 불길한 징조와 공포가 드리워진다. 전쟁이 시작된다.

 

- 한겨레 칼럼에서 / 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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