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늙어가는 징조

샌. 2015. 6. 16. 09:59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면 베란다 유리창으로 바깥 풍경이 보인다. 드문드문 사람이 오가고, 가끔 차들이 지나갈 뿐인 길이 초등학교 하교 시간이 되면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로 분주해진다. 여름이라 창문을 열어놓으니 바깥의 소리가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생활 소음을 들으며 지켜보는 것도 재미난 구경거리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사는 집의 제일 조건은 절간처럼 조용해야 했다. 에어컨을 들여놓은 것도 더위보다는 소음 차단이 주목적이었다. 산과 마주한 옆 동에 사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다. 너무 조용한 것이 싫다고, 밤이 되어 깜깜한 숲을 보는 게 무섭다고 한 그분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적막을 좋아했고 작은 소음에도 노이로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두 달 가까이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는 경험을 하면서 내 생각도 달라지고 있다. 적어도 그분의 말에 공감은 하게 되었다. 무료함 탓이었는지 모른다. 종일 집 안에 있으면, 그것도 하루가 아니고 몇 달이라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이 그리워지게 되는가 보다. 바깥에서 들리는 사람들 살아가는 소리에 귀가 기울여지는 것이다. 이젠 창문을 활짝 열고 있어도 더는 소음이 아니다.

 

산책을 하다 보면 만나는 할아버지가 있다. 대문 앞에 의자를 내놓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 아무 때나 거기를 지나도 십중팔구는 할아버지와 만난다. 그러니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할아버지는 길가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지나가는 차와 사람을 구경하는 게 낙(樂)인 게 틀림없다. 내가 거실에서 일없이 밖을 바라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결국은 나도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징조인 것 같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그저 같은 자리에서 세상 구경하는 재미에 빠지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인가 보다. 뒷날이 되면 나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젊었을 때는 이런 노인을 보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갈까 의아했다. 그러나 노년이 되면 노년 나름의 재미가 생긴다. 젊은이 입장에서는 재미라 할 수 없는 것이 재미롭게 된다. 아마 할아버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추억하는지 모른다. 할아버지 얼굴에는 소가 되새김 할 때의 느긋하고 평화로운 표정이 배어 있다. 불쌍하다고 연민을 보내는 건 주제넘은 짓이다.

 

늙어가니 몸이 굼뜨고 반응이 느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처가 낫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 손이라도 베이면 그저 흙을 뿌려두면 그만이었다. 피가 엉겨 붙었다가 다음날 보면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아마 요사이 부모가 본다면 세균이 옮는다고 질겁을 할 것이다. 그래도 아무 탈 없이 잘 컸다. 그러나 이제는 작은 상처라도 생기면 아무는 데 며칠이 걸린다.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지만 옛날의 흙 치료보다 훨씬 못하다. 중년이 되어 얻은 귀의 염증은 10년 넘게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젠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다.

 

폐렴을 치료하고 퇴원할 때 집에 오면 바로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서야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여진 비슷하게 미열과 두통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몸이 회복되는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리다. 음악에 비유하면 라르고(Largo)다. 둘째가 며칠 전에 갑자기 몸살 증상이 나타났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데다 메르스로 뒤숭숭한 분위기라 여간 걱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회사를 하루 쉬고 종일 잠자며 땀을 흘리더니 다음날에는 씻은 듯 깨끗하게 나았다. 젊은 게 좋기는 좋다. 이럴 때는 젊음이 부럽다.

 

60이 넘으니 몸은 여기저기 탈이 나고, 병이 생겨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나이는 몸으로부터 느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청춘을 돌려다오'라거나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악을 써봐도 세월의 완력은 막을 수 없다. 쇠약해지고 병드는 게 서럽기는 하지만 어차피 받아들여야 할 인생의 과정이다. 직접 아파보니 그 상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고 죽을 때까지 정진이 요구되는 것이리라. 제발 노추(老醜)나 부리지 말고 조용히 늙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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