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대국

샌. 2015. 9. 16. 10:21

한국의 현대 바둑사에서 가장 기억될 대국이라면 조훈현 9단과 중국의 녜웨이핑 9단이 맞붙은 1989년의 1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 결승 5국일 것이다. 전까지는 일본이 세계 바둑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녜웨이핑이라는 천재가 등장하면서 중국 바둑이 크게 융성하자 중국 출신의 대만 재벌인 잉창치씨가 전 세계의 바둑 고수 16명을 초대해 실력대결을 벌여보기로 한 것이 응씨배였다. 우승 상금이 40만 달러로 당시 윔블던 테니스 우승 상금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 이런 거액을 제시한 데는 중국이 반드시 우승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둑의 변방이었던 한국은 이때 조훈현 9단만이 초대됐다. 조훈현 9단은 미완의 강자로 여겨졌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16강전에서 왕밍완, 8강전에서 고바야시를 꺾은 뒤, 준결승에서는 린하이펑마저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예상대로 절대 강자인 중국의 녜웨이핑이었다. 5판 3선승제의 결승에서는 2대 2가 된 뒤 마지막 5국이 싱가폴에서 벌어졌다. 1989년 9월 5일이었다.

 

결과는 조훈현 9단이 145수로 불계승을 거두고 첫 세계대회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 승리는 조훈현 개인의 영광일 뿐 아니라 한국 바둑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박치문 씨가 지은 <대국>은 바로 이 역사적인 기보를 해설한 책이다. 다른 바둑 해설서와는 달리 수읽기 중심이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와 대국자의 심리 상태를 감성적인 미문으로 전해준다. 그래서 참고도 같은 건 없다. 색다른 맛이 나는 기보 해설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12수 - 실리의 길은 멋은 없지만 확실하고 예측 가능하다. 반대로 세력의 길은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한순간에 지푸라기만 남을 수 있다. 백은 흑에게 실리를 내주며 중앙을 도모하는 세력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간다. 바둑판의 중앙은 하늘처럼 넓다. 동시에 하늘처럼 공허하다.

 

36수 - 유장하다. 지푸라기만 남을 수도 있는 허공에 모든 것을 건다. 문화혁명의 칼바람에 쫓겨 헤이룽장성에서 돼지우리 당번을 했던 녜웨이핑 9단은 날마다 만주의 광활한 평원과 붉은 낙조를 보며 살았다. 그때의 시련과 깨달음이 녜웨이핑을 고수로 키웠다.

 

124수 - 헤이룽장성에서의 돼지우리 당번 시절, 그곳 만주의 드넓은 평원에서 붉은 낙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은원(恩怨)조차도 하찮은 것이 되고는 했다. 녜웨이핑은 조용히 124를 결행했다. 살(殺)의 수다. 계가를 포기하고 대마를 잡으려는 최강의 승부수를 던졌다. 아름답던 만주 평원의 낙조가 왜 하필 그때 스쳐갔는지 알 수 없었다.

 

145수 - 묘수는 아니다. 그렇다고 쉬운 수도 아니다. 웬만한 고수라면 볼 수 있는 수니까 조훈현이 못 볼 리 없고 녜웨이핑도 못 볼 리 없다. 145의 맥점으로 백 5점이 사망하며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녜웨이핑은 목을 늘어뜨렸고 조훈현은 그 목을 쳐줬다. 두 적수는 말을 잊은 듯 하염없이 판을 내려다본다.

 

나도 책을 따라 바둑판에 한 수 한 수 놓으며 이 대국을 음미했다. 직접 관전자가 된 듯 승부사의 호흡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박진감 넘치는 한 편의 드라마를 본 듯했다. 또한 바둑은 인생살이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집중해서 놓아본 탓인지 이 바둑은 145수까지 복기를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복잡하지 않게 진행된 측면도 있지만 바둑 한 판을 완전하게 재현할 수 있는 건 처음이었다. 비록 지긴 했지만 녜웨이핑의 호쾌한 대륙 스케일도 인상에 남는다. 그저께는 조훈현 9단이 지지옥션배에서 10대인 오유진 여류기사에게 패하는 걸 보았다. 26년 전 세계를 호령했던 호랑이도 세월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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