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부끄러운 손

샌. 2015. 12. 16. 08:25

내 손은 여자처럼 작고 곱다. 신동문이 말한 '야위고 흰 손가락' 그대로다. 스스럼없는 사람은 악수할 때 놀리듯 말한다. "남자 손이 이렇게 곱다니, 쯧쯧" 그래서 악수하는 게 싫다. 남자의 크고 투박한 손에 갇히면 한방에 제압당하는 기분이다. 모임에 나가면 도착하는 순서대로 일제히 악수를 하게 된다. 고역이다. 나는 통로에서 멀찍이 자리 잡고는 손 흔들기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때도 가능하면 핑계를 대고 악수를 피한다.

 

못난 손을 의식하게 된 건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다. 어렸을 때는 작고 흰 손이 자랑스러웠다. 공부하는 사람의 손이라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노동과 거리가 먼 손이 결코 자랑스러울 수 없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아채게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유약한 백면서생이라는 증거밖에 되지 않았다. 부르주아 냄새가 나는 것도 싫었다.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가 광란의 학살극을 벌일 때 일차 대상이 지식인이었다. 운 좋은 사람은 정신 개조 명목으로 농촌으로 쫓겨갔지만, 일부는 발각되는 대로 처형 당했다. 그때 크메르루주는 손을 보고 먹물 먹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별했다고 한다. 내가 그 시절 캄보디아에 있었더라면 제일 먼저 즉결처분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손을 부끄러워하는 건 굳은살 없이 너무 곱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자랐으면서도 삽이나 낫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않았다. 부모님은 등골 빠지게 일을 하면서도 내가 들에 나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그 시간에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공부는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다른 걸 잃었다.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습관은 내내 이어졌고 철부지가 되어갔다. 박사가 되지 못한 건 부끄럽지 않지만 낫질이 서투른 건 부끄럽다. 들깨와 참깨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수치스럽게 여긴다.

 

50대가 되어서야 다른 식으로 살아보자고 반동을 꿈꾸었다. 내 노동으로 먹을거리를 가꾸리라 다짐하고 귀촌을 결단했다. 집을 지었고, 논을 사서 쌀농사도 짓겠다 했을 때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소 어이없어했다. 결국 그들의 예상대로 몇 해를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옛말이 옳다는 것만 확인했다. 내 '작은 손 콤플렉스'의 결과였다.

 

책 읽고 이렇게 글이나 끄적거리는 게 좋으니 나는 천생 작은 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곁길로 나가려는 시도는 과거 한 번의 발버둥으로 충분했다. 거친 손은 내 팔자가 아니다. 생긴 대로 사는 수밖에 없다. 이젠 내 작은 손도 사랑하고 싶다. 그래도 다른 사람과 손을 맞잡는 것은 여전히 꺼려진다. 이 계절이 좋은 이유 중 하나, 겨울에는 장갑을 마음대로 낄 수 있다는 점이다.

 

'참살이의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퇴직하는 후배에게 주는 충고  (0) 2016.01.19
사람도 다 썩었다  (0) 2015.12.26
빈털터리로 행복하게 사는 법  (0) 2015.12.11
되면 한다  (0) 2015.11.27
상어가 사람이라면  (0) 2015.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