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라면을 끓이며

샌. 2015. 12. 22. 16:28

김훈의 산문집이다. 새로 쓴 글도 있고, 예전에 발표되었던 글도 들어 있다. 밥, 돈, 몸, 길, 글 등 다섯 가지 주제로 글이 묶여 있다. 작가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읽을 수 있으나 잡화점에 들어간 듯 산만한 감도 있다.

 

글은 역시 김훈 만의 색깔이 드러난다. 문체만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길이 특이하다. 작가의 안테나는 세상살이의 스산함에 주파수가 맞춰 있는 것 같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모든 문장에 들어 있다. 작가는 '낮고 순한 말로 이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소망'이 글을 쓰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김훈의 글에서는 삶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가 묻어난다. 글 쓰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런 진지함이 느낌의 깊이를 아득하게 한다. 사소해 보이는 존재나 현상에서도 의미를 찾아낸다. 아니면 비의가 숨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런 사유가 결국은 존재의 한계에 닿는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책의 제목으로 쓰인 '라면을 끓이며'는 음식에 대한 작가의 얘기다. 맛집이나 맛난 음식이 아니라 라면, 김밥, 짜장면 같은 주로 혼자서 먹는 쓸쓸한 음식에 대해서다. 1963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라면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조리법까지 라면에 관한 온갖 내용이 소개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만의 라면 레시피를 공개한다. 라면 포장지에 적힌 것보다 물은 더 많이 넣고 센 불에 시간은 더 짧게 한다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라면을 끓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이것은 쉽지 않다. 라면 국물은 반 이상은 남기게 돼 있다. 그러니 그 국물이 면에 스며들어 맛을 결정한다. 국물의 맛은 면에 스며들어야 하고, 면의 밀가루 맛은 국물 속으로 배어나오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고난도 기술이다. 센 불을 쓰면 대체로 실패하지 않는다. 나는 분말수프를 3분의 2만 넣는다.

 

나는 라면을 조리할 때 대파를 기본으로 삼고, 분말수프를 보조로 삼는다. 대파는 검지손가락만한 것 10개 정도를 하얀 밑동만을 잘라서 세로로 길게 쪼개놓았다가 라면이 2분쯤 끓었을 때 넣는다. 처음부터 대파를 넣고 끓이면 파가 곯고 풀어져서 먹을 수가 없이 된다. 파를 넣은 다음에는 긴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을 한 번 휘젓고 빨리 뚜껑을 덮어서 1분~1분 30초 더 끓인다. 파는 라면 국물에 천연의 단맛과 청량감을 불어넣어주고, 그 맛을 면에 스미게 한다. 파가 우러난 국물은 달고고 쌉쌀하다. 파는 라면 맛의 공업적 질감을 순화시킨다.

 

그다음에는 달걀을 넣는다. 달걀은 미리 깨서 흰자와 노른자를 섞어놓아야 한다. 불을 끄고, 끓기가 잦아들고 난 뒤에 달걀을 넣어야 한다. 끓을 때 달걀을 넣으면 달걀이 굳어져서 국물과 섞이지 않고 겉돈다. 달걀을 넣은 다음에 젓가락으로 저으면 달걀이 반쯤 익은 상태에서 국물 속으로 스민다. 이 동작을 신속히 끝내고 빨리 뚜껑을 닫아서 30초를 기다렸다가 먹는다. 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들면 파의 서늘한 청량감이 달걀의 부드러움과 섞여서, 라면은 인간 가까이 다가와 덜 쓸쓸하게 먹을 만하고 견딜 만한 음식이 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승 없이 혼자서, 수많은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며 배웠다. 레시피를 읽고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새롭게 열어나가야 할, 전인미답의 경지가 보이기는 하지만 라면 조리법 개발은 이제 그만하려 한다.

 

나는 라면을 먹을 때 내가 가진 그릇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싼 도자기 그릇에 담아서, 깨끗하고 날씬한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먹는다.

 

집에 혼자 있을 때 나도 라면을 가끔 끓여 먹지만 대충 끼니를 때운다고 생각했지 이렇게 연구하며 정성 들여 조리하지는 않았다. 라면 하나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끓이느냐에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대충 살면 삶의 질 역시 대충일 것이다. 우선은 김훈의 레시피를 흉내 내서라도 라면의 숨어 있는 맛을 음미해 보고 싶다. 가장 아름답고 비싼 도자기 그릇에 담아 깨끗하고 날씬한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을 먹는다는 게 인상적이다. 이런 것이 자기 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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