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광기와 우연의 역사

샌. 2016. 2. 22. 11:35

책을 한참 읽다 보면 낯익은 느낌이 들 때가 가끔 있다. 전에 읽었던 책임을 늦게서야 알아챈다. 옛날에 읽었던 책이란 걸 알면 왠지 싱거워져서 덮기도 한다. 이 책도 그러했지만 워낙 재미가 있어서 놓을 수가 없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필력 때문이다.

 

1881년에 태어난 츠바이크는 뛰어난 문장과 재미있는 내용으로 명성을 떨친 작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통합된 유럽이 만들어지리라는 희망에 부풀었지만, 히틀러가 등장하자 영국으로 망명하고 다시 브라질로 이주한다. 결국 나중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절망에 빠져 1942년에 아내와 함께 자살한다. 츠바이크는 진보적 사고와 휴머니즘적 이상을 지녔던 작가였다.

 

1927년에 나온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세계사의 극적인 순간 열두 장면을 선정해서 마치 영화를 보듯 재현해 놓았다. 제목에서 보듯 역사의 흐름은 이성이 아니라 광기와 우연에 지배되는 것 같다. 안타깝고 조마조마하면서 재미있게 읽힌다.

 

1.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건달 발보아(1513. 9. 25)

2.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오스만 튀르크의 잔인한 무하마드(1453. 5. 29)

3. 뇌졸증을 극복하고 부활한 헨델(1741. 8. 21)

4. 하룻밤 만에 프랑스 국가를 작곡한 무명의 루제(1792. 4. 25)

5. 고지식한 부하 때문에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한 나폴레옹(1815. 6. 18)

6. 괴테의 비가 - 열아홉 소녀를 사랑한 일흔넷의 괴테(1823. 9. 5)

7. 황금향 엘도라도를 발견한 수터(1848. 1)

8. 사형 직전 목숨을 건진 도스토예프스키(1849. 12. 22)

9. 대서양에 해저 케이블을 설치한 사이러스 필드(1858. 7. 28)

10. 악처 때문에 위인이 되었던 톨스토이의 미완성 드라마(1910. 10)

11. 남극에서 얼어죽은 비운의 탐험대장 스콧(1912. 1. 16)

12. 봉인열차를 타고 스위스를 탈출한 레닌(1917. 4. 19)

 

모두가 극적인 인생을 살았지만 그중에서 수터의 부침도 대단했다. 수터의 일생에서도 광기와 우연이 곳곳에 보인다. 범죄자로 몰린 수터는 아내와 아이 셋을 유럽에 놓아두고 서른한 살에 미국으로 도망간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뒤에 미지의 땅인 서부로 향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새크라멘토 계곡에 이민자 마을을 건설하고 자기만의 왕국을 만든다. 성과는 어마어마해서 농장에서 나오는 농산물 수확으로 엄청난 부를 쌓는다.

 

그런데 자신의 농장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모든 게 돌변한다. 골드 러쉬로 금에 미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무법천지가 된다. 수터는 모든 걸 다 빼앗기고 도망친다. 1850년, 캘리포니아가 아메리카 합중국에 편입되면서 상황이 변한다. 수터는 토지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5천만 불의 손해배상 소송을 건다. 1855년, 수터가 이기고 다시 최고의 부자가 된다.

 

그러나 재산을 잃게 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다시 모든 것을 빼앗기고 황무지가 된다. 세 아들도 이 와중에 죽는다. 수터는 반미치광이가 되어 워싱턴 법원과 의사당 근처를 이십 오년 간 맴돌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비웃음만 살 뿐이다. 자신의 땅인 샌프란시스코는 점점 번성한다. 결국 수터는 거지와 다름없이 살다가 1880년에 의회 계단에서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한다.

 

차라리 금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사소해 보이는 그 하나가 변곡점이 되면서 개인이든 국가든 흐름은 일순간에 바뀐다. 아무도 예견을 못하기에 운명이라고 부르지만, 광기와 우연이 만들어내는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역사의 수레는 무척 난폭한 말이 끄는 것 같다. 지그재그로 내달리는 수레바퀴에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흘렀을까. 인간의 광기를 줄인다면 우연도 줄어들고 운명은 좀 더 온순해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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