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4:1

샌. 2016. 3. 21. 12:30

전혀 예상 못했다. 과연 컴퓨터가 얼마나 인간 수준에 육박했을까, 궁금한 정도였는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4:1로 이긴 것이다. 체스는 몰라도 바둑은 안 된다고 누구나 말했다. 그러나 알파고는 무서웠고, 이세돌이 고전 끝에 첫 판을 항복했을 때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 저녁 야탑의 먹자골목에서 소주를 들이킨 건 바둑의 영역마저 기계에 내준 허전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기계의 계산 능력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인간의 창의성을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기보를 입력해서 학습한 알파고가 변칙수에 정확히 대응할 수 없으리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알파고는 프로기사도 예상 못한 멋진 수를 두었고 결국 승리의 발판이 되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가장 확률이 높은 수를 찾아내는 컴퓨터의 능력을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건 불문가지다. 그런데 그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번 바둑 대결을 보면서 사람들의 대응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호기심 정도로 가볍게 여겼는데 이세돌이 지면서 분위기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인간과 기계의 대결로 된 것이다. 그러면서 모두 인간의 승리를 응원했다. 바둑을 못 두는 사람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영웅이 등장하는 건 시간문제다. 갑자기 이세돌 신드롬이 일었다. 인류를 대표해서 기계와 싸우는 처절하고 고독한 이미지가 덧입혀진 것이다.

 

심지어는 알파고가 두는 건 바둑이 아니라는 항변까지 나왔다. 인간만이 바둑의 미학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보만 봤을 때 과연 인간이 둔 건지, 기계가 둔 건지 구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알파고는 철저하게 확률을 따져 착수한다. 그게 아름다움이 될 수 없을까? 어렸을 때 손목시계의 뒤뚜껑을 열어보고는 작고 정교한 기계의 움직임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자연계와 대비되는 아름다운 인공의 세계였다. 치밀하고 정확한 수읽기를 통해 승리로 이끌어가는 바둑이라면 인공지능의 작품이라고 해서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인간을 넘어설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때가 너무 일찍 찾아왔다. 우리는 급속도로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산업화의 시대를 벗어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새로운 쓰나미가 찾아오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삶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시킬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도구를 손에 넣고 있다. 그 세계가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건 호모 사피엔스는 새로 등장하는 신인류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컴퓨터를 당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내 생애 동안에는 보고 싶지 않았다. 컴퓨터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세계가 바둑에 존재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게 무너진 게 슬프다. 다음 착수점의 정답이 어디인지 앞으로는 알파고에게 물어야 할지 모른다. 그래도 알파고를 만든 건 인간이 아니느냐는 말도 별로 위무가 되지 못한다.

 

어차피 인간과 기계는 공존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알파고가 둔 바둑을 보며 인간이 두는 바둑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알파고가 바둑계에 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알파고를 통해 한 단계 더 진보하는 자극을 받았다면 반갑게 받아들일 일이다.

 

덕분에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누구도 하지 못한 교육적 효과를 거두었다고 과학계는 기뻐한다. 지금처럼 기초과학이 홀대받는 시대도 없었다. 우수한 이공계 인재들이 어디를 주로 지원하는지 보면 안다. 이번 알파고 쇼크가 준 긍정적 효과를 잘 살렸으면 좋겠다. 우리는 너무 좁은 울타리에서 사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예상 못한 인간의 패배였지만 많은 걸 배우게 된 이번 대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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